'별'이 빛나는 구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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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할리우드 영화'뜨거운 것이 좋아'(1958년)에서 마릴린 먼로가 신었던 구두.

주디 갈런드

주디 갈런드가 신었던 샌들. 코르크로 만든 통굽을 색색의 스웨이드로 감싼 독특한 구두다. 38년도 제작.

소피아 로렌

55년에 소피아 로렌을 위해 만든 샌들. 꽃무늬 자수가 놓여진 화려한 구두 앞부분이 인상적이다.

'투명 샌들'

'투명 샌들'. 나일론 낚싯줄을 신발에 응용하는 혁신적 아이디어로 47년'패션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육감적인 마릴린 먼로,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 정열적인 소피아 로렌, 깜찍한 주디 갈런드…. 개성은 서로 다르지만 한 세기를 풍미했던 이 할리우드 스타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이탈리아 출신의 구두 장인(匠人)살바토레 페라가모(1898∼1960)의 열렬한 고객들이다. 영화 소품을 위해, 때로는 미적 허영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할리우드 스타들은 너도나도 페라가모에게 그들의 발을 맡겼다. 페라가모의 손을 거쳐 할리우드 스타의 발에서 잠시 머물렀던 진품 구두들이 국내에 첫선을 보인다. 18∼25일 서울 청담동 페라가모 매장 1층에서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다.

페라가모 구두의 가장 열렬한 매니어는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이었다고 한다. 한국 전시품에는 헵번의 구두가 포함되지 않았지만 헵번은 아직도 페라가모 구두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주요한 고객이었다. 지금도 생산되는 발레리나 슈즈는 큰 키 때문에 무용가의 꿈을 접었던 헵번을 위해 페라가모가 만든 선물이다. 헵번은 호리호리하고 갸냘픈 몸매와 어울리지 않게 발이 컸다. 페라가모가 없었다면 작고 뻣뻣한 신발에 발을 맞추느라 고생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헵번의 큰 발도 잉그리드 버그먼과 캐서린 헵번 앞에서는 작고 앙증맞은 발에 불과하다는 게 페라가모 관계자의 말. 미인과 작은 발을 연관시키는 사람들을 무색하게할 만큼 발이 컸다고 한다.반면 왕관을 버린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윈저공의 연인 심프슨 부인의 발은 믿어지지 않을만큼 볼이 좁았다.

이탈리아 페라가모 박물관에 소장·전시된 스타들의 발본은 이처럼 알려진 이미지와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 페라가모의 발본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스타들의 발 사이즈를 훔쳐보는 재미가 구두를 감상하는 재미만큼 큰 이유이기도 하다.

마돈나

영화 '에비타'(1996년) 소품으로 쓰인 신발. 페라가모가 에바 페론을 위해 만들었던 신발을 마돈나에게 맞게 다시 제작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구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페라가모 박물관(www.salvatoreferragamo.it)에 소장된 1만여점 가운데 페라가모가 직접 만든 1930년대 수제화에서부터 97년 영화소품으로 쓰인 유리구두까지 모두 10점이다. 95년 박물관 개관 이래 미국과 일본 전시에 이어 세번째 외출이다.

전시품은 많지 않지만 유명인들이 직접 신었던 것들인데다 간략하게나마 구두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도록 연대별로 구성돼 있어 의미가 있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요즘의 페라가모 구두와 달리 전시품들은 하나같이 매우 화려하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로 유명한 미국 여배우 주디 갈런드를 위해 38년에 만든 샌들은 코르크 소재의 통굽을 형형색색의 스웨이드(속칭 쎄무)로 감싸 예술작품을 보는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소피아 로렌이 신었던 샌들(55년) 역시 견사(絹絲)와 진주 등을 사용해 꽃무늬 자수를 섬세하게 심은 하나의 예술품이다.

화려함은 조금 떨어지지만 스웨이드에 소가죽을 덧대 만든 구두는 마릴린 먼로가 '뜨거운 것이 좋아'(58년)에 신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눈길이 간다.

또 마돈나 주연의 '에비타'(96년)에 소품으로 쓰인 빨간색 신발은 페라가모가 실존 인물인 에바 페론을 위해 40년대 말에 제작했던 것을 마돈나의 발에 맞게 다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주인의 개성이 구두에 어떻게 반영됐는지에 주목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시대별로 혁신적인 소재가 어떻게 쓰였고 어떤 디자인이 등장했는지 등 제작 기법에 주의해서 보면 한층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47년에 만든 '투명 샌들'은 당시에는 상상도 못한 혁신적 소재의 도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발. 발을 감싸는 부분을 나일론 낚싯줄 수십 가닥을 합쳐 만드는 기발함으로, 구두로는 처음으로 '패션의 오스카상'이라는 니만 마커스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페라가모는 신소재를 끊임없이 구두에 응용했다.

코르크와 목재·펠트·다양한 합성수지 등 지금은 일상적이지만 당시엔 파격적인 소재를 과감히 구두에 끌어들였다. 소재뿐 아니라 디자인에서도 이런 도전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발 뒤꿈치를 드러내는 샌들. 페라가모는 20년대에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에 맞춰 발을 노출시키는 방향으로 신발을 디자인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게 바로 현대 여성들의 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준 샌들이다.

페라가모가 소재와 디자인 혁명을 계속한 것은 보다 편한 구두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기인한다.

191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할리우드에 정착한 페라가모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작은 신발에 무조건 발을 맞춰 신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신발을 디자인보다는 과학으로 먼저 접근했다. UCLA대학에서 해부학과 수학을 전공한 후 인체공학적인 디자인과 소재에 매달린 것이다.

'사람마다 발 모양이 다르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처음으로 주목한 페라가모는 고객들의 발본을 모두 나무로 떠서 각자에 맞는 수제화를 제작했다. 한국 나들이에는 마돈나의 발본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유행을 좇지않으면서도 가장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정평이 난 페라가모의 역사를 통해 착용감과 디자인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좇아온 구두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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