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식인을 두려워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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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산승(山僧)이 가을의 시작을 깨닫는 것은 달력을 보고서가 아니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 천하의 가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2월이 가까워짐으로써 대통령 선거의 임박을 눈치채는 것도 아니다. 각 후보자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이 이리 모이고 저리 줄서는 것만으로도 대선 분위기는 완연히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두 달여 앞으로 닥친 이번 대선이 3파전으로 계속될지, 양자 구도로 압축될지, 아니면 전혀 돌발적인 상황으로 진입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혼란 중에서도 출마 예정자들은 대선 승리를 위한 대장정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론 선거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어서 대선 출정(出征)은 대개 캠프가 중심이다. 그리고 각 대선 진영은 현역 정치인 이외에 전직 고위관료, 예비역 장성, 재계 인사, 법조인, 시민운동가, 인기 스타 등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혹자는 돈을 댈 것이요, 누구는 조직을 바칠 것이며, 어떤 이는 이름을 내놓을 것이며, 또 다른 어떤 이는 얼굴을 팔게 될 것이다.

바로 이들과 함께 대선 캠프에서 결코 빠지는 법이 없는 것이 일군(一群)의 지식인이다. 참모나 특보 혹은 고문의 자격으로 거의 모든 대선 캠프가 적게는 수십 명에서부터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대학교수나 연구원, 언론인 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문이나 정책개발 또는 공약발굴에 관련된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선 후보자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빌려주는' 것이 주된 활동이 아닐까싶다.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하등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나 정치적 행동에 직접 나서는 것 역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국가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고 이를 위한 그들의 선택 또한 주어진 현실정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매번 대선을 전후해 관행적으로 벌어지는 지식인의 대규모 정치 참여가 무색하게도 우리의 정치수준이 오히려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울 수 없다.

기실 작금의 한국정치는 국민적 불신을 넘어 혐오 대상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런데도 막상 저질정치의 장본인들은 덕담해서 꿋꿋하고 악담하여 뻔뻔하다. 국민의 눈치를 보긴 해야 하지만 크게 두렵지는 않은 것이 그 이유다. 딴은 그렇다. 헌법상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 실제 유권자 행세를 하는 것은 몇 년 만에 단 하루뿐이다. 그 때를 빼고 나면 국민은 사실상 실권자(失權者) 신세다. 싫든 좋든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의 원초적 한계다. 그렇다면 선거가 없는 평시(平時)체제에서 정치인들을 강도 높게 긴장시키는 메커니즘은 실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럴 때 지식인 사회는 정치집단을 머리로 감독하여 입으로 비판하는 역할을 대표적으로 수행한다.

한국정치는 그러나 지식인을 무서워하는 대신 우습게 여길 법하다. 왜냐하면 일부 지식인들의 정치적 지향이 도덕성의 측면에서 전혀 나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러브 콜에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먼저 추파를 던지는 일 또한 적지 않다고 하니 선비의 지조는 과연 죽었다. 철새 정치인을 연상케 하는 지식인 철새들의 희박한 정조 관념도 이젠 역겹고 지겹다. 아니나 다를까 대선 캠프를 수시로 바꿔 다니는 버릇은 후일 아무 권력자에게나 몸을 파는 것으로 쉽게 이어진다. 국정 실패가 잇따라 일어나도 정권의 '개국공신' 지식인조차 도대체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무슨 대단한 전문지식을 정치권에 공급하는 것도 아니어서 머리를 빌려주러 갔다가 머리를 빼앗기는 경우가 더 많은 형편이다.

물론 이번에 각 대선 캠프에 속한 지식인들은 과거와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지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정치참여에 있어서 혹여 지식인 본연의 사회적 책무와 국가적 사명을 또 다시 망각한다면 저질정치의 공범자라는 국민적 화살을 더 이상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만큼은 '머리 대여'에 나선 지식인들의 확고한 신조와 당당한 처신, 그리고 분명한 진퇴를 간곡히 당부한다. 머리와 돌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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