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간 상주 유일한 교민 박상화 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쿵! 콰르르…"

폭격음이 귀청을 때렸지만 두려운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함께 있던 방글라데시인 집사 1명과 함께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웅크렸다. 폭격은 50분 만에 그쳤지만 서너시간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바그다드에 남아 43일 전쟁 기간 내내 대사관을 지킨 박상화(朴相化·45)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전쟁이라 해도 매일 새벽 2시부터 50분간 폭격하는 게 전부였어요. 익숙해지니까 그 시각만 되면 처마 밑에 서서 구경했어요. 다국적군 전투기들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이라크군은 대공포고 소총이고 닥치는 대로 쏘아대고…. 불꽃놀이도 그런 장관이 없습디다."

朴씨는 이라크에 상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83년부터 19년째 이라크에서 살고 있다. 게다가 부인이 이라크인이니 그 자신도 반(半)이라크인인 셈이다.

전남 해남의 넉넉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난 朴씨는 고교 졸업 후 군대를 마치자마자 이라크행 비행기를 탔다. 중동 경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2∼3년 고생한 뒤 귀국해 사업체를 차릴 요량으로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시에서 도로공사를 벌이던 한양건설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대외협력업무를 맡아 열심히 일하던 그는 저녁이면 하숙집 옆집인 모하메드가(家)의 아이들과 놀아주며 외로움을 달랬다. 아이들은 살결이 희고 머리가 긴 이국청년 朴씨를 형이나 오빠처럼 따랐다. 특히 처녀 티가 나던 장녀 내시린(당시 여고생)은 朴씨만 보면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아름다운 그녀와 이라크인들 인심이 제 발목을 잡았죠. 이라크인들, 그렇게 친절하고 따뜻할 수 없어요. 같은 아랍인이라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나라 사람들은 깍쟁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계산적인 데가 있는데 이라크는 옛날 우리 시골 인심 그대로예요. 전혀 외국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어떤 면에선 서울보다 편했습니다."

회사의 지시로 85년 귀국했지만 반년을 못견디고 키르쿠크를 다시 찾았다. 이미 깊숙한 사이가 돼버린 내시린과 결혼해 이라크에 뼈를 묻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내시린 집안의 완강한 반대로 둘은 이별하게 된다. 내시린은 외부인과의 피 섞음을 극도로 꺼리는 이라크 내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 내시린의 아버지는 "너(朴씨)를 좋아하지만 사위로 맞을 순 없다. 내시린의 사촌들이 너를 죽일 것이다"라며 극구 말렸다. 눈물 속에 내시린을 떠나보낸 朴씨는 괴로움을 떨치려고 바그다드로 일터를 옮겼다.

삼성건설에 입사해 일하던 그는 89년 주 이라크 한국대사관에 행정요원으로 특채돼 이라크 관료들과 교분을 쌓게 된다. 부인도 이때 만났다. 한국대사관에서 번역사로 근무하던 다섯살 연상의 조르젯이었다.

기품있는 눈매가 매력적인 이 아시리아계 여인과 91년 걸프전 직전 결혼에 합의했고, 그해 말 식을 올렸다.

걸프전이 터진 날 그는 바그다드에 남은 단 두명의 한국인 중 하나였다. 대사관원들은 이틀 전 모두 철수했지만 그만은 "대사관을 지키겠다"고 남기를 자청했다.

"결혼을 약속한 여인을 두고 어딜 가겠나"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텅빈 대사관 홀 구석에 책상을 몰아 놓고 침대 삼아 밤을 지샜다. 아침이 되면 그와 함께 이라크에 남은 한국인 J씨를 만나러 갔다. 건설회사 직원인 J씨는 바그다드 외곽의 건설현장을 지키려고 남아 있었다. 그는 공습의 공포를 떨치려고 밤마다 양주를 병째 들이켰다고 한다. "J씨 침대 밑엔 늘 양주병이 구르고 있었지요. 깨우면 시뻘게진 눈으로 저를 맞았어요. 빈병더미를 나중에 세어보니 정확히 43병이더라고요."

朴씨는 걸프전이 끝난 뒤에도 복귀하지 않은 한국대사관을 대신해 외교업무를 계속했다. '1인 대사관'인 셈이었다.

이라크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워 업무는 순탄했지만 98년 미국의 이라크 공습에 한국이 지지성명을 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미국의 위성국가도 아닌 한국이 왜 우리를 미워하냐'고 관리들이 격하게 항의하는 거예요. 이라크인들, 한국 참 좋아해요. '꼬리(코리아의 현지발음)'라면 근면하고 똑똑한 민족으로 알고 있고, 한국 제품은 제가 봐도 과대평가됐다고 느낄 만큼 고급으로 쳐줍니다. 그런 한국이 공습을 지지하고 나서니까 무척 섭섭했겠죠."

올해 초 그는 13년간의 대사관 근무를 접고 '율리안'이라는 수출입업체 부사장으로 취임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국과 이라크의 다리 역할을 하며 살고픈 꿈을 펴기엔 사업이 최고라는 인식에서다. "한국에서는 이라크를 전쟁터로만 아는데 실은 세계 제일의 석유매장량(그는 발견된 원유량은 사우디가 더 많지만 잠재 매장량까지 치면 이라크가 최대 산유국이라고 주장했다)을 자랑하는 자원부국이에요. 이런 나라가 걸프전 이래 12년간 경제제재를 받아온 탓에 빌딩·공장건물들이 80년대 모습 그대로예요. 2∼3년 안에 제재가 풀리면 이라크는 중동건설 붐을 다시 일으킬 게 분명합니다. 한국 업체들은 지금부터 이라크에 지사를 세우고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두세달에 한번씩 서울을 방문해 이라크 진출에 관심있는 업체들과 상담하고 있다. 한국과 이라크의 교류를 도모하는 학자·기업인·종교인들의 단체인 '한국·이라크 친선협회'의 실무 일도 그의 중요한 비즈니스. 기자와 인터뷰하는 사이에도 그의 휴대전화는 연신 울려댔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열흘이 넘으면 짐을 싸 집에 갈 생각을 한다.

"서울에 1주일만 머무르면 두통이 나고 불편해져요. 바그다드 집이 그리워지는 거죠.이라크, 참 좋습니다. 덥지만 습기가 없어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합니다. 사막의 밤하늘을 덮는 별빛도 기막히고요. 그렇지만 제일 좋은 건 역시 그곳 인심이에요. 95년 집사람을 데리고 서울에 왔을 때 걸프전 직전 이라크를 떠났던 한국대사관원들 가족들이 집사람 손목을 잡고 울더군요. '전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녀 봤지만 가장 그리운 곳은 이라크'란 거예요. 이런 나라를 왜 공격하려 드는지 미국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미국이 공격해와도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 "전쟁은 전혀 두렵지 않다. 또하나의 고국인 이라크를 떠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정색하고 말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전쟁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강력한 지도자 후세인 대통령이 없어지면 이라크는 수십개로 쪼개지고 중동전체가 수라장이 될 겁니다. 미국은 공격에 앞서 전쟁이 빚어낼 무서운 결과를 숙고해야 합니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