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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내기, 게임비 내기 … ‘큐대’ 잡으면 마음은 20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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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딩~동.” … “아줌마, 났어요!”

1960~80년대 대학에 다닌 한국 남자 가운데 상당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안다. ‘났다’는 이 말의 근본은 알 수 없지만 뜻은 경기가 끝났다는 거다. 당구장에서만 쓰는 ‘전문용어’다. 그 시절, 재수 학원가와 대학가엔 당구장이 즐비했다. 서울 변두리와 시골 당구장은 동네 건달들의 놀이터였다. 추리닝에 슬리퍼 질질 끌고 나와 자욱한 담배 연기에 콜록대면서도 한껏 폼을 잡으며 맛세이를 찍었다. 요즘 당구장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 환기시설이 잘돼 있어 자욱한 담배연기는 사라졌다. 건달도 퇴출됐다.

재수를 할 때나, 대학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당구를 즐기는 50~60대 매니어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대기업 오너도 있고 전·현직 고위공무원, 의사, 대학교수 등 ‘성공한 분’들이 적잖다. 서울의 명문고 중 하나인 경기고 동문들은 매년 당구대회를 연다. 기수별 당구모임도 활성화돼 있다. 손쉽고 저렴하게, 친목을 쌓는 수단으로 당구만 한 게 없어서란다.

김희용 회장, “당구는 경제적 스포츠”

지난달 14일 오후 6시30분 서울 강남구 논현2동에 위치한 팬더당구장. 짧은 머리의 김희용(68) 동양물산기업(농기계 생산) 회장이 후배 기업가인 추모 사장과 당구를 치고 있었다. 세 개의 공을 사용하는 스리쿠션 경기였다. 보통 당구대보다 가로 60㎝, 세로 30㎝가 큰 대당구대(160×320㎝)에서였다. 정식으로 치르는 국제경기에서 사용하는 당구대다. 첫 게임은 김 회장이 지고 두 번째 게임이 중반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김 회장은 22점, 추 사장은 21점을 놓고 그 점수를 먼저 치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16점 대 11점에서 김 회장이 내리 4점을 쳐 20점이 됐다. 마지막 두 점을 남겨놓고 김 회장이 주춤한 사이 추 사장이 한 점, 두 점 따라오더니 막판에 5점을 내리치면서 금세 19점이 됐다. 차례가 오자 김 회장은 신중히 한 점을 더 쳤다. 이제 한 점만 더 치면 김 회장의 승리다. 초록색 당구대 위의 빨강·노랑·하양 공을 노려보던 김 회장이 타격자세를 취했다. 큐가 흰 당구공을 힘차게 밀어붙였다. 탄력을 받은 당구공이 뱅글뱅글 돌더니 당구대의 벽 4군데를 맞고 돌아와 중앙에 있던 빨강 공을 스치듯 밀고 갔다.

게임 종료를 알리는 버저를 누르는 김 회장의 손가락에 힘이 넘쳤다. 경기에서 진 추 사장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더니 “회장님, 제가 400원 밑졌습니다”고 했다. 첫 게임보다 게임비가 400원이 더 나왔다는 거였다. 김 회장은 “하마터면 내가 질 뻔했어…”라며 상대방을 치켜세웠다. 김 회장은 “회사가 근처라 이곳에 자주 오는데 지인들과 어울려 자장면이나 치킨, 게임비 내기하며 즐긴다”고 말했다. 골프보다 경기시간이 짧고 술자리 안 하고 집에 갈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이 김 회장의 친형이다. 경기고 56회(1960년 졸업)인 김 회장은 경기고 총동문회 당구모임 회장이다. 김 회장은 빠른 손놀림으로 큐를 분해해 케이스에 넣더니 개인 보관함에 뒀다. 큐는 80만원짜리라고 했다. 그는 “큐대(큐)는 자체가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예술품”이라며 “캐나다산 단풍나무를 여러 갈래로 자른 뒤 이어 붙여야 진동을 제대로 흡수한다”고 했다. 그는 큐 대신 서류가방을 들고 당구장을 빠져나갔다.

지난달 7일에도 김 회장은 이곳에서 지인과 당구를 쳤다. 당구 치는 장면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손을 내저었지만 당구 얘기는 술술 풀어놨다. 당구 예찬론자 같았다.
“옛날에야 당구장에 양아치들뿐이었지. 지금은 없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스트레스 풀러 오지. 환기가 잘돼 40명이 경기를 해도 목 안 아파. 대학 때부터 당구 쳤지. 이곳에선 20년 가까이 됐어. 당구는 경제적인 스포츠야. 당구장에 오면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사기 진작 차원에서 우리 회사에서 연 4~5차례 당구대회를 여는데 호응이 아주 좋아. 그런 회사들이 찾아보면 많아.”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등 당구를 즐기는 CEO들은 “취미로 하는 것”이라며 사진 촬영을 한사코 거절했다. 위 그래픽은 각자 당구 치던 모습을 토대로, 본지가 사진과 그림을 합성해 재구성한 것이다. 아래 왼쪽부터 김희용 회장, 조남원 삼부토건 부회장, 원경희 혜인 회장. 그 옆으로 경기고 68회 당구 멤버인 김문수·최돈구씨. 뒤편 왼쪽부터 성극제·박종훈·유종욱·이원규씨. 일러스트=강일구

그는 60대 후반의 나이다. 아직 당구가 재밌을까.

“남자로서 챌린지(도전)하는 거야. 당구 서너 시간 치면 운동 돼. 예전에 이상천 선수라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세계대회를 석권했어. 2005년 숨졌지만. 그 사람 영향으로 당구 동호인들이 많이 생겼지.”

당구가 국가적으로 투자하기에도 적합한 경기 종목이라고 했다.
축구는 트레이너까지 40여 명이 금메달 1개 놓고 다투지만 당구는 선수 한 명이 금메달 여러 개를 딸 수 있고 부상에 대비한 후보선수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큐 한 개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원래 경기고 선배 중에 당구를 잘 치는 원조는 김동건 KBS 아나운서”라고 소개했다. 장수 프로그램인 ‘가요무대’ 진행자 말인가?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김동건 아나운서는 “대학 다닐 때는 많이 쳤지만 안 친 지 한참 됐다”며 사양했다.

조남원 부회장·원경희 회장은 당구 단짝

이날 옆 당구대에선 조남원(65) 삼부토건 부회장과 건설중장비 수입업체인 혜인의 원경희(66) 회장이 당구를 즐기고 있었다. 삼부토건은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전통 있는 건설회사다. 혜인 역시 미국 캐터필러사의 굴착기 등 중장비를 독점 수입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했다.

조 부회장은 4구 기준 당구 실력이 400점대, 원 회장은 200점대란다. 둘이 만나면 3구 당구를 즐긴다고 한다. 원 회장은 최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조 부회장과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 사이”라며 “3, 4년 전부터 회사 근처 당구장에서 만나 얘기하고 게임도 하며 지낸다”고 말했다. 그는 “당구는 매번 묘수와 경우의 수가 대단히 많아 머리를 잘 써야 한다”며 “치는 동안은 다른 잡생각을 안 하게 돼 좋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곳 팬더당구장엔 경기고 동문이 많지 않다”며 “4년 후배인 내 동생(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을 포함해 서너 명 정도”라고 말했다. 대신 서울고 동문이 많이 찾는다. 당구장 주인 신항균(65)씨의 동기생인 서울고 16회(64년 졸업) 30여 명은 매달 셋째 토요일 여기서 당구시합을 한다. 윤영달 크라운제과 회장, 임내규 전 산자부 차관이 가끔 참석한다. 윤윤수 필라코리아 회장은 대회 협찬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동문 후배인 임채민(52) 지식경제부 1차관도 가끔 들른다고 한다. 재계에선 이웅열(54) 코오롱그룹 회장도 당구 실력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구장 주인 신씨는 당구 ‘타짜’다. 20대 때 당구에 미쳐 살았다. 한 재일동포 당구선수가 그를 일본으로 데려가 당구선수로 키우겠다고 하자 신씨의 부모가 “갈 테면 성을 갈고 가라”며 반대했다. 결국 못 갔다. 하지만 몇 년 뒤 당구장을 차렸다. 서울 중부경찰서 뒤편에 ‘블루웨이 당구장’이다. 신씨는 75년엔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MBC 묘기대행진’에 출연, 국내 최초로 당구 묘기를 선보였다. 맥주병 위에 공을 올려놓고 당구공을 점프시켜 떨어뜨리는 묘기를 비롯한 다양한 묘기를 선보였다.

경기고 동문이 자주 모이는 당구장은 선릉역 뒤편의 JS당구장이다. 지난달 7일 오후 대당구대 앞에 경기고 68회 당구모임 멤버 여섯 명이 모였다. 김문수(서울시당구연맹부회장), 성극제(경희대 국제대학원장), 박종훈(㈜평방 사장), 최돈구(호산실업 사장), 유종욱(한국전력 정년 퇴직), 이원규(㈜한명아이에스 사장)씨였다. 전체 12명 가운데 이용성 한양대 의대 교수, 김태균 타워팰리스 치과 원장, 마재준 내과 원장, 김종덕 마취과 의사, 안광조 나이스체크 사장, 사업가 양승찬씨는 다소 이른 시간이라 오지 못했다. 당구 실력은 4구 기준 300점(박종훈)에서부터 1000점(이원규)까지다.

평균 나이 57세로, 대부분 종로학원 출신이다. 고교 졸업 후 학원에서 재수할 때 당구장을 드나들어 4구 기준 최소 200~300점씩의 실력은 갖췄단다. 일부는 학원에서 500점(스리쿠션 핸디 20여 개)을 치고 대학 가서 700~800점(스리쿠션 핸디 30여 개)까지 쳤다. 직장생활하면서는 틈틈이 치다가 5년 전 동기 모임에서 의기투합, 정기적으로 당구시합을 하기 시작했단다. 이들은 당구장에 도착하자마자 치킨에 소주와 맥주를 시켜 마신 뒤 경기를 시작했다. 두 명씩 편을 가르고 리그전을 하면 4~5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한다. 경기 결과에 따라 게임비를 분담해 내고 자장면과 콜라·치킨값도 나눠 낸다. 대략 1인당 3만원이면 충분하다. 경기 69회 당구모임도 활발하다. 황윤철 에어로커브 사장, 최재호 숭실대 불문과 교수, 김흥준 신경외과원장 등 10여 명이 속해 있다.

경기고 68회 12명은 당구 매니어

최돈구씨는 “매년 개최하는 동문 당구대회에는 나이가 40대인 경기고 84회부터 60대인 60회까지 골고루 참여한다”고 말했다. 경기 방식도 원쿠션에서부터 4구, 스리쿠션까지 다양하다. 각 기수의 당구 고수들끼리 대결하는 스리쿠션 대회도 있단다. 이원규씨는 “골프는 타이거 우즈처럼 천부적 재능이 있어야 하지만 당구는 열심히 하면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당구의 최고점은 입신의 경지로 일컬어지는 2000점이다. 1500점 실력의 고수도 지금까지 4~5명에 불과하다. 국가대표는 대개 1000점.

허문범 당구협회 부회장은 “1500점 이상은 당구계에서 존경의 의미로 붙여주는 점수”라고 했다. JS당구장 대표 이장희씨는 서울시당구연맹 이사이자 연세대 교양 당구 교수다. ‘당구박사’로 통한다. 이 교수는 “당구는 치밀한 계산과 정확성을 필요로 하는 과학과 시스템의 스포츠”라고 말했다. 당구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금메달이 10개 걸려 있다. 올해 11월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13명의 국가대표 선수가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 가운데 차유람·김가영 선수는 포켓볼 세계랭킹 2, 5위에 올라 있다. 시장 규모도 크다. 전국에 당구클럽이 2만9000여 개이고 당구대는 20만 개다. 업계에선 당구 동호인 1200만 명, 하루 당구장 이용자를 180만 명으로 추산한다. 당구 시장과 함께 관련 사업도 다양해지고 있다. 케이블TV에선 오래전부터 당구경기를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당구장에 IPTV를 설치해 경기중계와 기술 교습을 하려는 벤처 기업(타운캐스트)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과 달리 당구는 아직 전국체전 정식종목이 아니다. 2007년부터 시범종목으로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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