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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읽은 카프카, 쉰 넘어 읽으며 삶의 절실함 깨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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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11면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길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을 가득 메운 인문학 강좌 수강생들. 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가 ‘고을과 마을의 지역이야기:지역문화와 생활문화’를 주제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8번째 강의를 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인문학(人文學) 공부 열기가 뜨겁다. 인문학은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분석적·비판적·사변적이다. 경험적 접근을 중시하는 자연과학·사회과학과 다르다. 철학·문학·역사학·고고학·언어학·종교학·여성학·미학·예술·음악이 여기에 속한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문지문화원 사이’, 중구 장충동2가의 ‘철학아카데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연구공간 수유너머N’ 등 서울시내 인문학 강좌 전문 기관은 10여 곳이다. 이곳에서는 연중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이어진다. 현재 진행 중인 강좌만 150개가 넘는다. 서초동 예술의전당 산하 예술아카데미, 계동 인문학박물관,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등도 여름 특별강좌 34개를 개설해 운영 중이다. 대학 여러 곳은 인문학연구소를 두고 있고, 일부 구청 구민센터에서도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다.

인문학의 바다에서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

경찰로 35년간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70대 노인, 50대 환경연구소 대표, 30대 장애인 주부를 만나 인문학 공부에 빠진 이유를 물었다. 이들은 “책 읽는 것이 좋아서” “대학 시절 문학에 심취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가정에 충실하느라 잃어버렸던 나를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인문학에 빠진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배우며 알아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다.

문화탐방 책까지 낸 70대 전직 경찰관
지난달 24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중앙고 내 인문학박물관. 전직 경찰관 현병주(73·사진)씨가 ‘안중근 의사의 평화론’이란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인문학박물관이 올해 ‘인문문화학교 3기 특별강좌’로 개설한 근현대사 관련 강의의 아홉 번째 수업이었다.

그의 집은 인천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집 근처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이곳으로 향한다. 꼬박 2시간이 걸리지만 1년째 계속하고 있다.
현씨는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의자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로 강사의 말에 집중한다. ‘70대의 나이에 공부를 열심히 하신다’고 하자 “젊어서 못다한 공부를 하는데 나이가 무슨 문제냐”며 “이제부터가 진짜 공부, 내가 즐겁고 좋아서 하는 진짜 공부”라고 했다. 현씨는 1963년 인천경찰서 수사과 형사로 경찰에 입문했다. 24세 때였다. 그후 인천서 수사계장-형사계장 등을 거쳤고, 82년부터 인천시경 과학수사계장으로 있다가 98년 정년퇴직했다.

(왼쪽부터) 현병주, 이금숙, 김종석

“당시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정의감도 있어서 경찰이 됐는데 사실 적성에 맞지는 않았어요. 퇴근하면 집으로 달려가 책을 읽는 게 낙이었죠. 특히 범죄감식반인 과학수사계에 근무할 때는 사건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확보하는 건 물론이고 범죄자 신문도 담당했죠. 업무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같은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서양문명사, 종교사까지 독서 범위가 점점 넓어졌어요.”
이렇게 책은 읽었지만 경찰생활을 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대화를 할 동료를 찾기는 어려웠다. 가슴 한구석이 공허했다. 그는 “책 읽기를 핑계로 경찰 일을 허투루 한 적은 없지만 35년 경찰 생활이 개인적으로 크게 즐거웠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털어놨다. 타고난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이 있다. 부당한 지시를 하는 상사의 멱살을 잡았다가 곤욕을 치렀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써 징계를 당한 적도 있다.

현씨는 정년퇴임 후 민간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직장생활을 계속했다. 그 바람에 미뤄뒀던 인문학 공부를 본격 시작한 건 2년여 전부터다. “그 즈음 루소의 계몽사상 강좌 때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구절을 들었어요.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나를 평생 따라다녔던 막연한 정의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단박에 설명해 주는 말이었거든요. 인간이 인간을 짓밟으면 안 되고, 그 당연한 섭리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공부에 불이 붙기 시작했죠.”

그동안 예술의전당 산하 예술아카데미에서 주최하는 20여 개의 인문학 강좌는 빠짐없이 들었다. 미술·건축·철학·문학·역사 등 분야도 가리지 않았다.

그는 배운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인도·유럽·캄보디아·중국 등으로 문화탐방도 다녀왔다. 문화탐방 때 찍은 70~80여 장의 사진에다가 역사적 사실을 적은 글을 모아 비잔티움 이야기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자비를 들여 판매용 아닌 개인소장용으로 만들었다. 컴퓨터 타자로 한 장씩 치느라 책 한 권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그는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답답하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서민의 애환이 담긴 역사인데 우리나라 역사서는 대부분 왕조사, 정치사 등 강자 위주로 기록돼서다. 그는 “아직 부족하지만 더 공부해서 민중사를 집필하는 게 궁극적 목표”라고 말했다.

“인문학 공부하며 잊었던 나 찾아”
서울 노원구에 사는 주부 이금숙(38·사진)씨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다. 평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생활한다. 이씨는 다음달 2일 고졸 검정고시를 치른다. 고2 때 몸이 아파 포기했던 고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다. 그의 꿈은 대학에 진학해 소설가가 되는 것이다.

이씨는 2006년 경희대 실천인문대학 ‘노원나눔의 집’ 1기 수강생이 되면서 소설가의 꿈을 더욱 키우게 됐다. 철학·국어·문학·주민운동·예술·체험학습 등을 6개월 동안 수강했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이씨는 변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장애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인문학은 나태하고 안일하게 살던 나에게 다시 뭔가 하고 싶은 욕구를 생기게 했다”며 “결혼 후 10년 동안 잊고 살았던 나 자신을 다시 찾았다”고 했다.

배움에 대한 욕구는 많았는데 학창시절엔 몸이 아파서 못했고, 결혼 후엔 아들과 남편을 위해 사느라 못했다. 이씨는 2007년 2기, 2008년 3기 강좌도 틈틈이 들었다. 올 4월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실천인문대학 수료생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심화반 강좌를 듣고 있다. 그동안 접한 강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기동 경희대 철학과 교수의 강의였다.

“수업 중 우 교수님이 자기 동네에 장애인 시설을 설치하는 걸 찬성했던 경험을 얘기했어요. 다른 이웃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 등으로 설치 반대 서명을 받으러 왔을 때,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며 거절했다는 얘기였죠. 대학교수에다 엘리트라고 생각했던 분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이해해 준다는 것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이씨는 그날 수업을 얘기하다가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씨는 예술 수업 때 받은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날 강사로 나온 서광열(경희대) 교수는 교육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사례를 들었다. “어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죽은 쥐를 만지고 던지며 놀고 있는 걸 보고 ‘쥐는 더럽다’며 그만 하라고 타일렀다. 알고 보니 쥐를 햄스터인 줄 잘못 알아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이씨는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 초등학교 2학년 아들 준석이에게 쥐와 햄스터의 차이를 물었다. 아들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이씨는 체험교육이 아닌 주입식 교육의 폐해임을 깨닫고 너무 안타까웠다고 했다. 인문학을 통해 아이 교육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고 풀어가고 싶다고 했다.

“말로는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자고 하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누군가는 1등이 돼야 한다고 경쟁만 가르쳐요. 이율배반적이죠. 인문학이 아이들의 인격 소양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소설가가 되면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냐고 묻자 곧바로 “사랑이죠. 사랑이 없는 세상은 공허하잖아요”라고 했다.

“문학이 스포츠보다 더 다이내믹”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는 섬진강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쓴 김용택 시인이 배우로 등장한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 작법을 강의하는 김용탁 시인 역할을 맡았다. 그가 수강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시를 쓴다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는 게 더 어려운 것입니다.”타성에 젖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움을 추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사다.

에코리켄 환경연구소 김종성(51·사진) 대표는 영화 속 이 장면을 보고 문지문화원 사이를 찾았다. ‘말, 혹은 고백의 논리: 소설가 김연경의 세계문학 읽기’라는 문학 강좌에 등록했다. 김 대표는 아직 공부를 시작한 지 4주 정도인 새내기 학생이다. 지난달 22일 수업이 막 끝난 오후 9시에 김 대표는 “영화 속에서 진지하게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니 30년 전 대학생 때 문학을 좋아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다시 그때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전공은 화학공학이다. 대학원까지 마친 후 17년 동안 환경 연구 분야에 종사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환경연구소는 자원 순환과 유해물질 관리를 주로 다룬다. 그가 인문학을 공부하며 얻는 기쁨은 뭘까. 그는 “그동안의 삶에서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을 읽고, 나누지 않던 대화를 하는게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읽었던 대문호들의 명작을 나이가 들어 다시 정독해 보니 맛도, 감회도 새롭다고 했다.

“대학시절 읽었던 카프카와 지금 읽는 카프카는 확연히 다르게 다가와요. 그때 문학이란 건 사실 남들이 읽으니까 교양을 위해 읽는 것이 대부분이었죠. 지금은 똑같은 ‘변신’을 읽어도 주인공의 절실함, 절망이 확확 다가옵니다. 내 나이 쉰이 넘어 깨달은 겁니다. 문학은 교양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김 대표는 지적인 쾌락이 뭔지 알아가는 게 즐겁다고 했다. 그는 “책 내용 중에서 어렴풋이 이해했던 걸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확실하게 알게 될 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게 됐을 때 바쁜 시간을 쪼개 수업에 출석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일상에 쫓기는 보통 사람들이 난해한 철학이나 전문성이 필요한 미술·음악, 이름만 들어도 거창한 문학 공부를 당장 시작하긴 쉽지 않다. 김 대표는 무엇이든 지레 겁부터 내지 말고 첫발을 내딛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인문학 공부라고 해서 꼭 심각하고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거창한 목표를 세울 것도 아니고. 몰랐던 것을 알아갈 때 행복함, 활기참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요? 문학 공부도 스포츠·여행과 같은 활동과 다를 바 없다고 봐요. 오히려 더 다이내믹할 수도 있어요. 스포츠는 심신의 활력소가 되지만 인문학은 삶을 아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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