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예산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백11조7천억원에 달하는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정부는 외환 위기 이후 악화된 재정 수지를 균형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자랑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경기가 불투명한데 예산은 너무 긴축적이지 않으냐, 정부가 별로 해주는 것도 없는데 1인당 조세 부담 3백만원이 웬 말이냐, 복지나 교육 지출의 증가 폭이 큰 것은 대선을 앞둔 선심성 예산 책정이 아니냐는 것 등이다. 심지어는 너희들이 뭔데 다음 정권의 예산을 맘대로 정하느냐는 으름장식 논평까지 들린다.

평소 재정 문제에 있어 정부 쪽에 달가운 얘기를 한 기억이 많지 않은 필자지만 이번만은 정부 편을 들어주고 싶다. 정부의 예산안이 완벽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정부 예산의 흠을 잡자면 논문을 하나 써도 부족하다. 그런데 대부분은 지난해나 지지난해 예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내용이고 기존 예산 제도의 개혁이 없다면 내년에도 마찬가지로 지적될 것이다. 예산의 결산 기능을 강화하고, 기금과 특별 회계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예산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라는 등의 모범 답안이 나온 지는 오래다. 실천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이번 예산안에서 과거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정부 스스로 일반회계에서 적자 국채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어차피 큰 적자가 안 날 바에야 이것이 무슨 대수냐 할지 모르지만 필자의 눈에는 정부 스스로 족쇄를 차겠다는 이 결정이 내년 예산의 핵심이다.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현재의 여건에서 실보다 득이 크다. 외환 위기 당시 그래도 재정 기조가 건전했기 때문에 적자 재정을 펴고 구조 조정 재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적 자금의 원리금 상환과 사회보험의 재정 불균형, 나아가 잠재적 통일 비용까지 걱정해야 할 지금은 재정이 건전하다고 장담하기 힘든 형편이다. 또한 경제 상황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자칫 재량적인 재정 정책이 경기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재정 규율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해마다 반복되는 추경예산의 편성이다. 자연 본예산 편성이나 실제 집행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기 쉽다. 물난리는 해마다 반복되는데도 예산심의 과정에서 예비비는 줄고 이상한 지역구 사업 예산은 늘어나는 일까지 벌어진다. 추경이 없다면 배정된 예산을 알뜰히 써 정부의 생산성도 올라갈 것이다. 나아가 추경 편성은 재정의 거시 조정 기능을 취약하게 만든다. 재정 정책은 시차를 두고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본예산의 재정 수지 계산은 정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년에는 달라질까? 일단 적자 국채 발행을 안 한다고 선언을 했으니 어지간한 재해가 아니면 추경예산을 짜겠다는 얘기를 쉽게 못 꺼낼 것이다. 전문가나 시민단체의 예산 감시도 훨씬 힘을 받을 수 있다. 예산이란 정부는 더 쓰고 싶어하고 국민의 대변자인 의회는 이를 견제하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는 여야 없이 돈 쓰겠다는 정치인들만 즐비하니 규율이 생길 리 없다. 결과는 봐야 알겠지만 이번 경우 정부 스스로 재정 규율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점에 일단 점수를 주는 것이다.

물론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일과 외부 충격 흡수를 위해 재정을 신축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경기가 나빠지면 세수 감소와 사회보장 지출의 증가로 인해 자연적인 적자 요인이 생기는데, 이것마저 무시하면 경기 불안이 가중되거나 예산의 우선순위가 뒤틀릴 수 있다. 무리한 긴축을 하다보면 성장 잠재력에 도움을 주는 투자 항목이 덜 급하다는 이유로 삭감되기 쉽다.

구조적인 재정 적자나 재량적인 재정 팽창은 경계하더라도 경기 변화로 인한 단기적인 적자 요인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균형예산이라는 형식논리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세수 예측 능력의 향상이나 평가 기능의 강화 등 예산 당국에 주문하고 싶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내년부터 추경예산을 편성하지 않는다는 성과만 이룬다면 다른 많은 것은 용서될 수 있다. 민생보다는 자기 몫이나 챙기려 드는 몰염치한 의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