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과 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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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과학의 발전은 양적인 확충과 질적인 종합의 과정이다.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설명함으로써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의 목록을 늘려 가는 작업을 양적 확충의 과정이라 한다면, 서로 다른 현상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포괄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다양한 현상 사이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질적 종합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게 하는 질적 종합의 과정은 그 자체가 세계의 기본 구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어서, 그 결과는 우리의 세계관을 상당히 크게 변화시킨다.

물리학에서 이에 해당되는 예는 많다. 낙하하는 사과와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아무 연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현상은 초기 조건만 다를 뿐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동일한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운동이라는 것이 뉴턴의 중력 이론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전자기학 이론이 발전하면서 그 이전에는 다른 것으로 알았던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동일한 물리적 근원에서 연유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전자기학 이론의 기초를 완성한 맥스웰은 빛이 전자기파의 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과와 달이 종합되고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종합되며 빛과 전자기 파동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물리학이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됐다. 미시세계에 대한 탐구에 의해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는 파동성을 가지며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빛은 입자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파동과 입자에 대한 이해가 종합됐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므로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물리학자 뉴턴과 철학자 칸트에 의해 제시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 입장을 근원적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상대론은 중력과 가속도가 동일하고 질량과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파동과 입자, 시간과 공간, 중력과 가속도, 질량과 에너지 등의 종합으로 인한 세계관의 변혁과 함께 현대물리학의 발전이 이룩됐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디락의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드러난다. '진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진공은 기준이 되는 어떤 에너지 이하의 모든 상태가 하나도 빠짐없이 입자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공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충만'의 상태다.

그러면 우리는 입자로 가득 찬 이 충만의 상태를 왜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는가. 그건 물이 가득 찬 어항 속의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어항 속에 기포가 있다면 즉, '물의 없음' 혹은 '물의 결핍'이 있다면 물고기는 무언가를 볼 것이다. 그러나 어항이 물로 꽉 차 있다면 물고기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이 물고기와 같이 우리는 충만의 상태를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인식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진공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색즉시공:모든 존재자가 공하다'고 하는데,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는 완전한 충만의 상태를 진공이라고 부른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넘나든다. 그럼 무엇이 있음이고 무엇이 없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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