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공산품 협상은 느긋 :"시장 더 열자" 우리가 공세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공산품과 관련한 뉴라운드 회의는 다른 회의보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참석자들의 목소리도 또 얼굴도 느긋하다. 시장개방 압력이 크지 않아서다. 그래서 그런지 공산품 시장개방에 관한 민간의 관심도 미지근하다.

지난 8월 말 열렸던 '비농산물 시장접근 분야 대책'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석자 대부분이 관계부처 공무원들이었고 업계에서는 달랑 두 사람만 자리를 같이했다. 소비자 입장을 대변할 사람은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다.

공산품 부문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개방이 진척돼 수입자유화는 특별히 더 보탤 것이 없고 또 관세율도 이미 상당 폭 낮췄기 때문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홍역을 치르면서 농산물·서비스에 대한 시장개방을 늦추는 대가로 공산품의 시장을 더 개방하고 관세도 낮추기로 한 결과다.

우리가 새롭게 또는 크게 내놓을 게 없다보니, 여느 때와 달리 공산품 시장개방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입장이 오래간만에 공세적이다. 전문가들이 모여도 "다른 나라에 무슨 시장을 열라고 요구할 것인가" "선진국이 남발하는 반덤핑 같은 수입 규제 조치를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 등을 주로 논의한다.

협상국들이 모두 시장개방과 관세인하를 실시하면 제조업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춘 우리나라로서는 당연히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진국 시장도 열리지만 개도국 시장이 더 열려서다.

그렇다고 만사 오케이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우리가 개도국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선진국클럽)의 다른 나라보다는 관세율의 평균 수준으로 보나 관세율이 과도하게 높은 품목의 숫자로 보나 우리나라의 관세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세인하 협상이 은근히 신경쓰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낙균 연구위원도 "우리 관세가 높아 어떤 관세인하 방식이 채택되든 다른 선진국에 비해 더 큰 폭으로 관세를 인하해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지금까지 나온 관세인하 방식으로 양자협상(두 나라가 마주 앉아 품목별로 협상)·부문별 협상·혼합방식 등 다양한 제안이 나와 있는 상태다. 양자협상의 부담이나 부문별 업계의 반발을 감안해 우리는 모든 나라가 일률적으로 관세를 낮추는 소위 '공식(formula) 접근방식'을 원한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들은 내년 5월 말까지는 공산품 시장개방 협상방식을 정하기로 했다. 일단 그게 정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관세인하 협상이 날개를 달게 된다.

각국이 내놓은 제안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무(無)관세화와 환경상품(환경보호에 도움을 주는 상품)개방이다.

일본이 제안한 무관세화(관세를 없애는 나라끼리만 서로 관세를 받지 않는 것)는 정보통신(IT)제품으로 재미를 본 무관세화를 일본이 자신 있는 가전제품 등 여타 부문으로 확산하자는 것이다.

그중 우리가 신경쓰이는 부문은 자동차다. 당장 자동차 업계가 "만일 자동차의 무관세화가 추진되면, 특히 중대형차는 국내시장의 반 이상이 수입자동차에 넘어갈 것이다"(자동차공업협회 김태연 통상협력팀 차장)라고 반응을 보인다.

EU의 환경상품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반대하기 힘들다. 환경보호에 도움도 줄 겸 세계무역도 늘릴 겸 환경상품의 시장개방 폭을 다른 품목보다 더 크게 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걸 환경상품으로 볼 것이냐다.

미국은 용처가 환경보호에 도움을 주는 상품만 환경상품에 포함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EU는 거기에 환경친화적으로 생산되는 것까지 포함하자는 얘기다. 산업연구원 김도훈 산업정책실장은 "EU의 제안은 환경보호를 빌미로 사실상 시장개방 폭을 넓히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따져봐야 한다"며 신중하자고 권한다.

우루과이라운드 때처럼 각국이 지금 관세를 대략 3분의 1 정도씩 낮춘다고 가정하면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이 적게는 1%, 많게는 2.6% 정도 늘어나게 돼 있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 추산).

그러나 시장개방이 주는 충격과 혜택이 부문별로 다르기 때문에 "통상협상을 통한 국익 극대화를 위해 국내 부문간 입장 조율이 중요하다"(외교통상부 박상균 심의관)는 데 이견이 없다.

그 부문 중 가장 중요한 게 소비자다. 개방을 통해 가장 혜택을 보기 때문이다. 소득은 늘어나고 물건 값은 싸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개방에 대한 우리 소비자의 관심은 별무다.

오늘도 뉴라운드 대책회의의 빈 자리 하나, 소비자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