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평화 협상…은행강도 사건으로 파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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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0여년을 끌어온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이 엉뚱한 은행강도 사건으로 파탄이 나게 생겼다. 지난 연말 발생한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은행강도 사건이 북아일랜드 독립파 테러리스트 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소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 지역 치안책임자인 휴 오르드 경찰청장은 7일 "은행강도는 IRA의 짓이다. 보름간의 수사 결과 용의선상에 떠오른 혐의자들이 모두 IRA 관계자들이며, 다른 증거들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경찰은 "IRA가 평화협상이 마무리될 경우 일거리를 잃게 되는 테러리스트 조직원 1000여명의 생계지원을 위해 한탕 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은 지난 연말 '지역 내 정치세력 간 연합 자치정부 구성안'에 거의 합의한 상태에서 마지막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

사건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500억원에서 800억원 사이로 추정되는 피해규모부터가 예사 강도가 아니었다. 복면강도 10여명이 3개조로 나눠 움직인 치밀함도 특별한 조직 같았다. 워낙 거액이라 은행이 아예 지폐 디자인을 바꿔 새 돈을 찍어내는 방안을 검토 중일 정도다.

경찰의 수사 결과가 나오자 IRA를 대변하는 정치 조직인 신페인당은 "IRA와 은행강도는 무관하다. 경찰의 정치적 편견"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나머지 정치세력들은 일제히 IRA를 비난하고 나섰다. 북아일랜드 최대 정당이자 IRA 반대파인 민주연방당(DUP)은 "어떻게 강도와 같이 연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협상은 끝났다"고 잘라 말했다. DUP와 신페인당은 평화협상의 양 당사자다.

협상을 후원해온 영국와 아일랜드 정부도 손을 들었다. 북아일랜드 현 정부 수반인 폴 머피 장관은 "협상은 신뢰다. 그 바탕이 흔들리고 있다. 당분간 어떤 진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고 전망했다. 미국.영국.아일랜드 3국이 기울여온 10여년의 정성이 과격파의 무모한 한탕으로 물거품이 되고 있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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