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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못 따라가는 낡은 법·제도 IT분쟁 해결잣대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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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인 다음커뮤니케이션즈의 유창하 법무팀장은 요즘 '성형'이란 말만 들어도 골머리가 아프다. 다음 게시판에 네티즌들이 '○○병원의 성형 수술이 잘못됐다'는 글을 올릴 때마다 해당 병원에서 '명예훼손'이라며 다음에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게시판의 글을 지울 수도 없다. 이 경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네티즌의 거센 비난이 금방 쏟아진다. 유 팀장은 "사이버 공간에서 이런 일이 수없이 발생하지만 이를 해결할 잣대가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변화 못따라가는 법·제도=코믹 성인물 작가 김모(33)씨는 최근 인터넷 등단의 꿈을 접었다. 지난 5월 코리아닷컴과 유료 콘텐츠 계약을 하고 하루 3~4시간씩 자는 강행군 끝에 작품을 완성했지만 인터넷에 콘텐츠를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인물이라 어디선가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인터넷 콘텐츠를 심의하는 곳이 없었던 것. 김씨는 "근거가 없으니 하소연할 곳도 없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정보가 돈'이라는 정보화 시대에 아직 정보를 훔치는 것이 절도인지 아닌지조차 논란거리다. 대법원은 최근 기업체의 컴퓨터에 저장된 설계도면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H사 연구개발부장 지모(42)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수원지법에 돌려 보냈다.재판부는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 자체는 재물에 해당되지 않아 정보를 훔친 행위를 절도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나 학계의 시각은 다르다. 연세대 박상기 교수는 "정보화 시대에 정보는 상품보다 중요한 경우가 많다"며 "정보를 '전자기록 장치에 의한 기록' 등으로 개념을 좁혀서라도 처벌조항을 형법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업계 역시 박 교수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전산원 조용혁 주임연구원은 "정부가 95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전자서명법 등 1백90여개의 법령을 정비했지만 국민 생활과 밀접한 상거래·노동·의료 분야 법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쉽지 않은 개선작업=이동통신 업체들이 자랑하는 '위치 확인 서비스'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휴대전화 사용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첨단 서비스다.

이 서비스를 활용하면 미아나 길 잃은 치매 노인을 금세 찾아낼 수 있다지만, 가입자의 위치가 노출돼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다. 정통부 정용환 정보화기반과장은 "현재 위치정보 보호 및 이용 활성화 등에 관한 법 제정을 준비 중이지만 오·남용 우려를 제기하는 시민단체 등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음반협회와 소리바다 간의 저작권 논쟁도 마찬가지다. 음반협회가 소리바다에 대해 음반 복제 금지 등에 관한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리바다는 가처분 결정을 피해 새로운 방식으로 서비스를 재개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유광현 변호사는 "P2P(peer to peer)방식을 통한 자료 교환과 양쪽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만한 법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디에도 아직 없다"며 "개인적 용도를 위해 복사하는 이른바 '사적 복제'는 저작권법 위배가 아니라고 보는데 P2P 방식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사적 복제인지 아닌지 이론조차 정립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통부 관계자는 "여태껏 경험해 보지 않은 정보화 관련 문제들이 속속 발생하지만 법령 정비는 국회 통과에 시간이 걸리는 등 한계가 있다"며 "그렇다고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까지 예상해서 법을 먼저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활발해지는 논의=하지만 최근 정부와 학회 등에서 법·제도 정비 작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고무적이다.

정통부는 지난 5월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내에 정보사회 법·제도 개선센터를 만든 데 이어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공동으로 'e코리아 법·제도 정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각종 토론회도 활발하다.

한국전산원이 주관하는 'e-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한 법제 토론회'는 ▶9월 조세제도▶10월 지적재산권▶11월 전자서명과 전자문서 등으로 매달 주제를 바꿔가며 열린다. 오는 28일에는 '인터넷과 기본권 보장의 한계'를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밖에 한·중 정보통신 관련 법제도 국제학술 세미나(9월),인터텃 시대의 국제사법 토론회(11월) 등 정보화 시대의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다.

한편 전문가들은 범정부적인 조정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통부 등 일개 부처에서 추진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방대할 뿐 아니라 부처별로 다른 입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통부 관계자는 "최근 디지털 저작권·데이터 베이스 관련법 제정 과정에서 정통부와 문화관광부가 갈등을 겪기도 했다"며 "국회를 중심으로 학계·법조계·산업계 등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새로운 법질서 정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 허운나 의원 측은 "인터넷 시대에 맞는 법·제도 개선은 각 이슈가 워낙 첨예하게 대립돼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입법활동에 나서기 어려운 점이 있다"며 "사회적 합의를 먼저 이루는 과정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윤·염태정 기자

휴대전화 스팸 메일이 극성을 부리고, 대형 온라인 금융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며, 온라인 게임의 사이버 아이템 매매로 소비자 피해가 속출하는 등 정보화 시대의 부작용이 크게 늘고 있다. 정보기술(IT)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면서도 관련 법률과 제도는 '386'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각종 법·제도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은 무엇인지, 정보화 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알아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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