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걸프전 명분과 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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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2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이라크 측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대량 살상무기의 공개해체, 테러리스트 지원 중단, 소수 민족 탄압중지, 걸프전 포로 및 실종자 공개, 그리고 국제사회 구호물자의 투명한 처리등 5개 항을 신속히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미 미 국방부는 중부군 사령부를 카타르에 전진 배치시키는 등 대 이라크 전에 만반의 준비를 기하고 있다. 이라크의 상기 5개 조건 수락 여부가 불투명한 가운데 이제 유엔안보리 결의와 미 의회의 승인만 떨어지면 제2의 걸프전은 기정사실화된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명분은 다분히 취약하다. 부시는 이번 전쟁을 '문명과 폭군'의 대결로 정당화하고 있지만, 독재자 사담 후세인 한명을 제거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의 살상을 전제로 한 대규모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대량살상무기 확산과 국제 테러리즘과 관련해 이라크가 즉각적 위협이 되고 있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도 아직 제시되지 못한 상황 아래서 이라크 침공을 감행할 때 미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서 명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실리다. 그러나 실리 면에서도 크게 우려된다. 무엇보다 이번 전쟁은 단기전으로 끝나기 어렵다. 이번 전쟁의 목표가 후세인 제거에 있기 때문에 지상군 투입을 통한 가택수색과 시가전은 불가피할 것이다. 미국 측 인명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시가전을 전개할 경우 시간을 끌 수밖에 없다. 공화국 수비대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정예군과의 시가전은 더욱 그렇다. 더구나 걸프전 이후 쌓여온 이라크 국민의 뿌리깊은 반미 정서를 감안할 때 이번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도미노 효과도 걱정된다. 사담 후세인은 그의 세속적 바트주의 노선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슬람의 적으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은 후세인을 이슬람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며 아랍 전체에 대규모 반미 이슬람 저항연대를 확산시킬 수 있다. 이 경우 국제 테러와의 전쟁에 차질을 가져 올 뿐 아니라 친미 노선의 주변 아랍제국에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야기하면서 아랍권 내에 체제전복의 도미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문명과 폭군의 대결이 이슬람권과의 문명대결로 치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이 승리한다 해도 이 지역의 전략적 안정을 보장하기는 어렵다.미국의 승전에 따른 후세인 체제의 붕괴는 이라크 내부 혼란을 심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후세인 체제의 해체는 북부 모술을 거점으로 한 쿠르드족과 남부 바스라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 무슬림들의 분리주의운동을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터키와 이란의 세력권 확대와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에 대한 아랍권의 반발은 이 지역을 제2의 발칸으로 만들 공산이 크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후세인 체제의 폭력적 전복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모험과 같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제2 걸프전 발발이 유가 상승 등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한반도 안보에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걸프와 동북아 지역에서 두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는 없기 때문에 최근 대두되고 있는 2003년 한반도 안보 위기론을 희석시키는 기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세계의 이익이란 차원에서 볼 때 이번 전쟁은 명분과 실리 모든 면에서 정당화되기 어렵다. 아무리 중간선거, 텍사스 석유, 그리고 군산복합체라는 정파적 이익이 중요하다 해도 대승적 명분과 실리의 기반이 약한 전쟁을 무리하게 감행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은 외교적 수단을 포함해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라크 사태를 슬기롭게 수습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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