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트紙의 승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아침식사 때 빌트지는 꼭 식탁 위에 올려 놓고 봐라. 이유는? 손에 들고 보면 식탁 위로 피가 쏟아지니까'.-독일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는 이 우스개처럼 빌트지의 성격을 절묘하게 묘사한 말도 없다.

올해로 창간 50주년을 맞은 빌트는 독일 황색 저널리즘의 대표 신문이다. 빌트(Bild·그림)라는 이름에 걸맞게 첫 페이지부터 요란하다. 주먹만한 제목에 기사 내용도 온통 '엽기'투성이다. 젖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사진은 기본이다. 게다가 논조는 요즘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수구·반동'이다.

그러면 빌트는 독일의 대표적 저질신문인가. 아니다. 우선 독자가 가장 많다. 하루 발행부수가 4백만부를 넘는 독일 최대다.

그리고 빌트는 여러 강점을 갖고 있다. 우선 특종을 많이 한다. 기사가 간결하지만 알차다. 독일판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그날 가장 중요한 화젯거리가 무엇인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그래서 정치인이나 관리·기업인 같은 여론 주도층도 이 신문을 찾는다. 무엇보다 독일주재 외국 특파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이 바로 빌트다. 창업자인 악셀 슈프링거가 내걸었던 '독자의 심장에 와닿는, 그러나 품위를 지키는 신문'이란 기치가 그대로 살아 있는 셈이다.

이 신문이 지난달 독일 정부와 한판 붙었다. 빌트가 집권 좌파 연정소속 의원들이 대거 연루된 '마일리지 스캔들'을 터뜨리자 사민당 측이 소송을 냈다. 총선을 앞두고 의도적인 좌파 때리기라는 것이다.

그러자 독일 언론계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11개 주요 신문·방송·주간지 편집 및 보도국장들이 빌트 지지성명을 냈다. 대표적 좌파 언론인 슈피겔의 슈테판 아우스트 편집국장은 '법적 총기난사'란 표현까지 써가며 빌트를 두둔했다. 요컨대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는 그 어떤 정치 행위보다 상위 개념이란 것이다. 결국 사민당 측은 소송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엊그제 독일 신문보도의 헌법재판소 격인 독일언론위원회도 빌트지의 손을 들어 줬다. 보도에 따른 의무를 준수했고 정치적 의도가 없어 편파보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좌·우, 또는 진보·보수로 갈라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하고 있는 우리 언론계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