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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사막에 내던져진 반직장인 ‘캠퍼스 샐러던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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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여름방학요? 계절 학기, 영어강사 아르바이트, G20 대학생 통역단 등 학기 때보다 더 바쁘네요. 취업 준비도 하고 등록금도 조금이라도 벌어야죠. 하나도 안 놓치려니 언제나 촉각이 곤두선 것 같아요. 잔뜩 긴장한 채 사막을 두리번거리는 미어캣처럼.” (장혜원·21·이화여대 정치외교학 3)

성균관대 경영전략학회(S-ONE)의 운영진 6명이 기업 관계자를 만날 때 사용하려고 만든 명함을 들어보였다. 왼쪽부터 이순명(25), 박선화(21), 허훈(25) 학이선경(23), 이은지(21), 허승연(22)씨. 이들은 반은 학생이고 반은 사회인 생활을 하는 ‘캠퍼스 샐러던트들’이다. [강정현 기자]

맹수를 경계하는 미어캣의 본능은 2010년을 사는 대학생을 닮았다. 1년 등록금이 1000만원, 비정규직도 구하기 힘든 취업 환경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황량한 사막 같다. 대학생들은 미어캣처럼 적극적인 도전과 다재다능함으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본지는 ‘미어캣 세대’ 라는 요즘 대학생을 조명해 봤다. 지난 5~6월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팀과 함께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을 조사·분석했다. 동국대·동아대·배재대·부산대·서강대·서울대·연세대·전북대·충남대·한양대 등 전국 10개 대학 1~4학년 남녀 학생 640명을 면접 설문했다.

글=구희령·정선언·김효은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미어캣(meerkat) 몽구스과의 포유동물로 주로 남아프리카의 사막 지대에 산다. 자칼 등 맹수를 경계하기 위해 사막 한가운데에 두 발을 들고 서서 보초를 서듯 사방을 살핀다. 별명은 ‘사막의 파수꾼’. 독에 면역이 있어 전갈이나 뱀을 먹어도 중독되지 않는 강한 생존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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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경영전략학회(S-ONE) 회장 허훈(25·소비자가족학 4)씨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학교에 나가는 일이 많다. 취업 시즌이 아닌데도 익숙해진 드레스 코드다. 그의 대학 생활은 사실상 ‘사회인 생활’이다. 허 회장은 지난달 말 롯데제과의 신상품 개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허 회장은 “최근 봉지 과자보다 프리미엄 제품이 인기인데 그쪽으로 컨셉트를 잡고 마케팅팀 앞에서 발표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발표하는 것이 100% 반영되지는 않지만, 비실무자인 대학생들의 신선한 의견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학회는 매 학기 대기업과 산학협동 작업을 한다. 지난 가을 학기엔 밤샘이 잦은 요즘 대학생을 위한 에너지 음료 아이디어를 냈다. 올봄부터 그 아이디어가 반영된 제품이 시판되고 있다. 25명의 회원들은 학기 중 매일 저녁 세 시간씩 모였다. 시장 조사와 소비자 설문은 끝냈고, 신제품 시안과 프로모션 전략도 마무리 단계다.

운영진 중 한 명인 이은지(21경영학 4)양은 “스펙쌓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라면 허탈한 기분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허 회장은 “우리는 단지 취업을 위해 몸값을 올리려는 게 아니라 공부하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낮에는 공부, 밤에는 일을 해 온 이들은 ‘캠퍼스 샐러던트(salaried man과 student의 합성어)’의 전형이다.

◆반(半)학생·반(半)사회인=원래 ‘샐러던트’는 밤에 시간을 내서 대학원 등에 다니며 공부하는 직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캠퍼스는 반대되는 현상이 주류다. 대학에 다니면서 사회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다. 높은 등록금과 취업 전쟁 때문이다. 소극적인 ‘스펙(spec·취업에 필요한 학력·자격증 등의 조건) 쌓기’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대기업 프로젝트를 쫓아가 일부분을 따내고, 독자적인 이벤트를 열어 기업에 자신을 어필하는 식이다. 이력서에 쓸 경력을 채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맡은 업무를 완수해 내는 프로 근성과 전문성까지 보인다.

지난 6월, 연세대 경영대 학회인 BIT 회원들도 기말 고사 기간에 ‘제2회 TEDex 연세’ 준비에 땀을 흘렸다. TEDex란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를 표방하며 미국의 비영리단체 TED가 노벨상 수상자 등을 초청해서 여는 대중 강연회다. 지난 1월 한국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TED의 인증을 받아 행사를 개최했다. BIT 강필준(26·경영학 4)씨는 “어떤 인턴 경험보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이라서 더 열정을 쏟는다”고 설명했다. 아예 직장인들과 함께 동아리를 운영하기도 한다. 대학금융공학연합회(UFEA)에선 서울 시내 대학생 50명과 직장인 30명이 함께 모여 매주 토요일 세미나를 연다. 이지영(23·이화여대 경제학 4)씨는 “직장인들과 함께 공부하면 경영학부 수업을 뛰어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시각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동아리도 이중 전공=사회 진출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아리의 지형도 바뀌었다. 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김수환(25)씨는 동아리 가입 ‘재수생’이다. 지난해 마케팅 실무를 익힐 수 있는 동아리 마프(MARP)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뒤 해외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뒤인 지난 3월 합격했다. 마프의 신입 회원 경쟁률은 5대 1이 넘는다. 서류 전형과 면접 등 선발 과정이 까다로워 김씨 같은 ‘재수’는 기본이다. 경영대 동아리임에도 회원의 절반이 인문대·공대 등 다른 단과대 소속일 정도로 상한가다. 김씨는 “매주 실제 기업의 위기 사례를 마케팅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하면서 수업 시간에 배울 수 없는 실무 지식을 배운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정보와 경쟁력을 얻을 수 있고 취업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동아리지만 재도전했다”고 말했다.

‘동아리 갈아타기’도 보편화됐다. 1~2학년 때는 연극·노래 동아리 등 취미와 관련된 동아리를 하다가 3~4학년 때는 주식·투자·경영 동아리 등으로 바꾼다.

경희대 웹진 ‘인터넷 Future 경희’의 박인정(경제학과 4)씨는 “취업과 관련 있는 동아리를 ‘메인’으로 하고 밴드·영화 등 취미 동아리는 ‘서브’로 하는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동아리에도 전공과 부전공이 생긴 것이다. 동아리 운영진은 대개 명함을 갖고 다닌다. 외부 강사를 초청하고 기업을 다니면서 대외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관련 업체에서 동아리에 지원금을 주고 우수 인재를 채용하는 일도 종종 있다. 동아리 신입 회원 모집을 ‘리크루팅’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진 이유다.

☞◆잉글하트의 탈물질주의 분석=미국 사회학자 잉글하트가 사회 구성원이 어떤 가치를 선호하는지를 보기 위해 만든 조사법. 12개의 가치를 물질주의·탈물질주의적 가치로 나눈 뒤 3개의 4지선다형 질문에서 각각 두 개의 답을 고르게 해서 가치관을 측정한다.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5개 이상 선택하면 물질주의자로, 0~1개면 탈물질주의자로 분류된다. 물질주의적 가치는 ▶고도의 경제성장 ▶물가 안정 ▶경제 안정 ▶강력한 국방력 유지 ▶범죄 없는 사회 ▶국가기강 확립과 질서 유지,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정부 결정에 여론 반영 ▶여론 중시 ▶지역사회 가꾸기 ▶정신이 중요한 사회 ▶언론자유 보호 ▶인간적인 사회 등이다.

이번 조사에서 대학생들의 ‘탈(脫)물질주의 성향’을 조사한 결과 22%를 차지했다. 2004년 조사에서 8.1%였던 것에 비해 6년 사이 3배가량 증가한 수치다. 대학생들이 각박한 현실 때문에 물질만 추구할 것이라고 예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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