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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지만 미워할수 없는 녀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영화배우 차승원(31)은 요즘 코미디 영화라는 파란 물에서 팔딱팔딱 뛰는 고기 같다. 채소로 치면 제철이고 연장으로 말하면 바짝 달았다. 지난해 '신라의 달밤'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조폭 이성재와 분식집 여주인 김혜수를 놓고 다투는 체육 교사를, 올해 '라이터를 켜라'선 무지하게 어깨에 힘주다 어리버리한 김승우한테 한방 맞고 쓰러지는 깡패 우두머리를 맡아 코미디 연기에 관한 한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다.

지난 6월부터 그는 '주유소 습격사건''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과 '광복절 특사'를 찍고 있다. 이 영화는 탈옥한 두 모범수가 자신들이 8·15 특사 명단에 끼어있음을 알고 다시 교도소로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지난달 29일 국내 최초로 교도소 세트를 차린 전북 전주의 촬영 현장을 찾았다.

입추에 처서까지 지났건만 여전히 후텁지근한 열대야였다. 전주공고 뒤편 공터에 마련된 촬영장. 제작진이 일부러 심은 수풀 탓인지 모기떼가 극성을 떤다. 이날은 재필(설경구)과 무석(차승원)이 숟가락 하나로 굴을 파 탈옥에 성공하는 장면을 찍는 날이다. '광복절 특사'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이 장면은 벌써 몇번이나 촬영이 무산됐다. 비 때문이다. 개봉도 개천절로 미뤄졌다 또 연기됐다. 때문에 '개천절 특사에 이어 성탄절 특사 되는 거 아니냐'는 농담마저 나올 지경이다. "얼굴이 많이 탔다"며 차승원에게 말을 건네니 "속이 타서 얼굴까지 탔다"고 대꾸한다. "촬영은 계속 미뤄지는데 밥만 축내는 것 같아 미치겠네요."

밤 11시, 오렌지빛 죄수복을 입은 차승원과 설경구가 분장을 시작했다. 물에 이긴 진흙을 온 몸에 바른다. 얼굴엔 스프레이로 물을 뿌린다. 진흙이 굳을까봐서다.

"누구는 머드팩을 한다는데 우린 이게 뭐야…." 눈에 진흙이 들어갔는지 괴로워하는 차승원. 가슴팍에 수인번호 '1052'가 선명하다. 진흙을 닦아내고 나면 얼굴이 온통 빨갛게 붓는다고 했다.

"자, 내가 승원이형! 하고 부르면 있는 힘껏 빠르게 나와. 레디, 고!"

김감독의 호령에 "어푸, 어푸-" 소리가 들리면서 미리 파 놓은 굴 속에 들어가 있던 흙범벅이 된 배우 두명이 빠져나온다. "얼굴이 안 보여." 정광석 촬영감독의 지적이 떨어진다. 죄수복을 입혀놔도 패셔너블하다는 차승원, 맨발로 진흙탕 속에서 구르니 속절없이 망가졌다.

"내가 이러고 있는 지금 이 시각, 다른 멜로 영화의 주연 배우는…." "모기한테 얼굴 물리면 오늘 촬영은 쫑난다"며 열심히 모기차단제를 바르던 차승원이 갑자기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며 와인을 마시는 흉내를 낸다. 현장에 폭소가 터진다. 무슨 뜻일까.

"차승원씨는 함박스테이크 자르는 분위기 있는 멜로 영화 하는 게 꿈이래요." 설경구의 귀띔이다.

"코미디만 한다고 다들 뭐라 그러는데 저라고 왜 달라지고 싶지 않겠어요. 저도 멜로 영화 하면서 우아하게 나오고 싶어요. 코미디만 하니까 제 카리스마가 확! 죽는 것 같아요." 농 섞인 진담이었다. 차기작 '선생 김봉두'도 코미디다. 본인은 멜로라고 주장하지만.

-늘 역할이 대동소이한 것 같아요. 껄렁껄렁하고 무대뽀에 폼 잡고.

"아, 당연하죠. 작가(박정우)가 같으니까(웃음). 뭘 하더라도 제 본래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네요. 다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놈인지…(일동 웃음)."

-'신라의 달밤''라이터를 켜라' 그리고 이번 배역 중에서 누가 가장 본인과 닮았어요?

"조금씩 다 닮았는데…. '라이터를 켜라'의 양철곤이 제일 비슷하네요. 결혼해서 애도 있고 또 겉으론 강할 것 같은데 속은 여리니까. 양철곤이 나중에 아내한테 전화해서 막 울잖아요. 아무래도 나랑 닮은 인물을 연기하는 게 결과도 좋더라고요."

그는 대본을 받으면 '분석용'으로 세 권이 더 필요할 정도로 배역 연구에 철저한 배우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어느 시점에서 관객들이 웃을지 본능적으로 알게 되더란다. "그런데 '광복절 특사'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재미있어야 보는 사람도 신이 나는데 대본을 지나치게 숙지해 계산을 하다 보면 그런 자연스런 감정이 안 날 것 같아서요. 꽂히는 대로 갈 거예요."

"모기들이 피 다 빨아먹고 배 두들길 때 쯤 한 컷 찍는다"던 김감독의 설명처럼 새벽 3시가 가까워와도 작업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좁은 땅굴 속에서도 차승원은 막간을 이용해 여유있게 담배 연기를 피워올린다. '오버한다' 싶을 정도로 쉴새 없이 쏘아올리는 농담과 뻔뻔스러울 정도로 만만한 여유. 누구 말마따나 그를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놈'으로 만드는 비결인 듯했다.

전주=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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