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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총맛 좀 보실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모델로 삼은 선배는 있나요." TTL 소녀로 유명한 임은경(19)에게 단답형 질문을 던졌다. 이동통신 광고를 통해 신비적 색채를 발산해온 소녀가 배우로서 어느 만큼 준비가 됐는지를 떠보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는 TV 광고 이전엔 배우라는 직업을 꿈도 꾸지 않았던 그냥 여고생이었다.

역대 한국 영화 가운데 최고 제작비인 1백10억원(마케팅비 포함)을 쏟아부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감독 장선우)의 주인공에 발탁돼,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그인지라 호기심이 증폭됐다.

"아무도 없어요. 그냥 임은경이죠. TTL 소녀는 이제 과거일 뿐입니다. 혹시 나중에 후배들에게서 임은경 같은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제법 당돌하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체구와는 정반대다. 겁 먹은 듯 동그랗게 뜬 눈, 소녀티를 벗지 못한 수줍은 미소, 잡티 없는 아기같은 피부를 잠시 잊게 한다.

'장난'을 한번 더 걸어봤다. "이젠 배우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물으니 손이 먼저 입을 가린다. "아직도 얼떨떨해요. 부담이 너무 크거든요. 다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게 연기의 매력이죠. 아직 명함도 내밀 형편이 못되지만…." 띄엄띄엄 숨을 고르며 말하는 품새에서 긴장감이 그대로 전달된다.

하지만 영화 속의 임은경은 달랐다. 39㎏의 갸날픈 체구로 3㎏짜리 기관총을 발사한다. 날아가는 헬기에 매달리는 위험한 장면도 서슴지 않았다. 수중 촬영 때는 하루 종일 수영장에서 나오지 않아 장감독이 "정말 독한 아이구나"라고 혀를 찼을 정도다. CF의 무표정한 중성적 이미지와 달리 발을 돌려차고, 공중을 날고, 총을 쏘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촬영장에선 "정말 겁이 없는 애군"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어려서부터 무서운 게 별로 없었어요. 이번엔 안전 장치도 있는데 겁낼 필요가 없었죠. 처음엔 헬기가 두려워 대역을 썼는데, 저도 한번 타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도전했죠. 다른 장면에서도 대역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이왕 하는 연기, 할려면 제대로 하고 싶었거든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안데르센의 동화를 팬터지 액션극으로 각색한 영화다. 성냥을 파는 원작과 달리 임은경은 라이터를 파는 소녀로 나온다. 재미있는 건 영화가 현실과 환상(게임)을 교합했다는 점. 임은경은 이번에 오락실에서 동전을 바꿔주는 소녀 희미(현실)와 아무도 라이터를 사주지 않아 얼어 죽을 운명의 라이터 소녀(게임)를 동시에 연기했다. 게임의 시스템에 버그(오류)가 생겨 그가 라이터를 사지 않는 사람에게 총을 난사할 때의 슬픈 눈빛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하다보니 욕심이 났어요. 처음엔 대본도 없어 암담했어요. 특히 '라이터 사세요' 정도 외에 별다른 대사가 없어 무척 힘들었죠. 시놉시스(줄거리 요약)에 제 감정을 빼곡이 정리해 촬영장에 갔습니다. 부모님과 오래 떨어져 눈물도 많이 흘렸지요."

그래도 데뷔작이라 후회스런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지난해 1월 촬영을 시작했으니, 지금 쯤이면 힘 꽤나 빠졌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래요. 영화 앞부분은 다시 찍고 싶어요. 나중에 보니 엉성한 구석이 띄더라구요. 그만큼 기량이 늘었을까요(웃음). TTL의 기계적, 혹은 가녀린 이미지도 물론 있지만, 사실 그점 때문에 장감독님이 캐스팅했대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는 장면에선 전혀 다른 저를 보실 겁니다."

그가 배우의 맛에 길들어진 모양이다. 1999년 TV 광고에 전격 출연하기 전만 해도, 현모양처가 꿈이었다는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현재 류승범과 함께 찍고 있는 '품행제로'에서 전교 1등의 당돌한 여고생으로 나온다.

"아직 자신감이 부족해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환상의 세계고, '품행제로'는 제가 태어났던 80년대 초반 얘기라 얼마나 잘 소화했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론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제가 잘 알고 있는 인물과 상황이 있는 그런 영화를 하고 싶습니다."

임은경은 요즘 사진에 푹 빠져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노인들의 표정을 잡고, 감상하는 게 즐겁다고 한다. 내년 중앙대 연극학과에 들어가면 반드시 사진 동아리에 들겠다고 했다. "36장짜리 한롤을 찍으면 두 세장 건질 정도입니다." 영화 속의 소녀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는 사회, 현재의 자기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가 그가 꿈꾸는 세상이다. 배우로서, 나아가 사회인으로서 세상에 조금씩 눈을 떠가는 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순도 1백%의 깜찍이 소녀 임은경이 '여전사'로 변모한 모습은 오는 13일 만날 수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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