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속에 갇힌 현대인 출구는 없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구멍 (EBS 밤 10시)='애정만세'(1994년작)를 기억하시는지.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젊은 여성과 실적이 보잘 것 없는 영업사원 총각. 팍팍하고 답답한 공기가 짓누르는 대만 타이베이. 개발과 경제성장에 쫓겨 '정신'을 돌볼 여력을 빼앗겨 버린, 전형적인 제3세계 국가의 이 대도시에서 동성애자와 독신 여성은 어찌 할 바 없는 막막감에 몸서리치다 결국 목놓아 울어버린다.

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의 데뷔작 '애정만세'(베니스영화제 대상)를 봤다면 '구멍'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다. 남녀 주인공으로 이강생과 양귀매가 다시 출연한 데다 주제의식도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 대도시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진다. 감염된 이들은 불빛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고 곧 수도가 끊길 예정이라 건강한 주민들도 대피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 위층 남자와 아래층 여자가 바닥(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소통하게 된다.

이를테면 현대인들의 소외라는 질병에 대한 진단이다.'침묵도 사운드의 일종'이라며 '애정만세''하류'에서 줄곧 한 음절의 음악도 사용하지 않았던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뮤지컬을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1998년작. 원제 The Hole.★★★★(★5개 만점)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