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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펜더’에서 기타 헌정 … 무대로 돌아온 록의 대부 신중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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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경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 요즘 기분 좋으시죠.

“좋기도 하지만 겁도 나요. 부담이 크죠.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기타를 받았고, 뭔가 들려줘야 하는데…. 들려줘도 세계적으로 들려줘야 하고 세계적인 음악을 해야 하니까요.”

● 펜더에서 헌정했다는 건 이미 세계적인 음악을 하고 계시다는 증거 아닌가요.

“록은 세계 공통의 음악이에요. 자기 문화를 담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장르죠. 제가 한국적 록을 주장했고, 한국 록의 대부라는 이야기도 나돌고 하니 그쪽에서 관심을 가졌겠죠. 하지만 과분해요. 진짜 유명한 기타리스트들만 받은 건데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제가 받은 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저만이 갖고 있는 음악성과 주법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제 가치를 평가받는 계기가 된다면, 부담을 좀 덜지 않을까 해요.”

● 펜더에서는 언제 접촉해 왔나요.

“기타를 헌정하기 약 1년2개월 전쯤요. 제가 원하는 기타의 모양, 원목의 자재 등을 묻더군요. 받아보니 너무 좋은 거예요. 일생에 이런 기타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2006년 은퇴 공연을 한 뒤 대중 앞에서 음악을 할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거라 각오했어요. 그런데 기타를 받게 된 건 못다 한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해요.”

● 미국서 음반을 낸다는 소식도 들리는데요.

“라이트 인 디 애틱 레코드라고, 빛 못 본 곡을 찾아내서 음반을 내는 회사래요. 펜더를 통해 연결이 됐어요. 김정미의 ‘NOW(나우)’(1973년)를 오리지널대로 내고, 제 음악 중 골라서 2장짜리 CD도 따로 하나 낼 겁니다. 10월에 출시한다고 들었어요.”

● ‘나우’는 특별히 아끼셨죠.

“제작자가 상품 가치가 없다고 음반을 안 내주는 거예요. 제가 가정용 카메라로 재킷 사진을 찍어 갖다 주면서 ‘내가 아끼는 곡이니 기념으로 한 장이라도 좀 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간신히 몇 장 찍곤 판이 죽었죠. 지금은 희귀 음반이 돼 엄청난 고가품이에요. 당시 너무 어렵고 힘들게 만들었던 기억 때문에 판 나온 뒤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마스터링을 하면서 들어보니 좋긴 좋더라고요. 내가 언제 저렇게 했었나 싶기도 하고.”

● 당시 사이키델릭(환각) 음악에 심취하셨죠.

“과거 인간의 감각이란 어느 한계에 놓여 있었죠. 그런데 60~70년대에 대마초와 환각제가 세계를 휩쓸면서 환각 상태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어요. 매킨토시를 만든 게 히피예요. 컴퓨터·카메라와 영상 모든 것들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죠. 그것이 점점 발전해 아이폰, 3D처럼 인간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문화가 탄생했어요. 오늘날엔 마약으로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없어요. 현실 세계에 널려 있는 시스템이 이미 환각의 세계가 현실화된 것이니까요. 인간이 할 일만 남았을 뿐, 예술에서 마약의 역할은 그때 끝난 거죠.”

● 헌정 기념 전국 투어 중이신데요.

“몇 군데 공연을 했고요, 9월 17일 순천, 10월 23·24일엔 세종문화회관 중극장에서 공연해요. 지방 구석구석을 돌아보려고 해요. 방송에서 하는 쇼적인 음악도 있지만, 음악성을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서는 라이브 문화도 살아있어야 균형을 이루고 발전해요. 그런데 지금은 음악이란 게 전멸돼 버렸죠. 제가 좀 늙었지만, 힘 있는 동안엔 알리고 싶어요. 기타 소리가 이런 것이고, 이게 진짜 음악이란 걸.”

● 대철(시나위)·윤철(서울전자음악단)·석철(드러머) 세 아드님도 음악인의 길을 밟고 있지요.

“그놈들도 상도 많이 타고 그랬대요. 그래도 음악인으로 살기 힘들죠. 공연 때 라이브하는 친구들은 다 와서 인사하고 가는데, 은근히 책임이 주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음악인들이 활동할 수 있게끔 영역을 뭔가 만들어놨어야 하는데…. 나름대로 하긴 했지만, 워낙 우리나라에서 리얼 뮤직이란 게 존재하기 힘들다 보니 그들도 안정을 못 찾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했더니 점점 더 심해지고…. 후배들 보면 저도 눈물이 나오려고 하죠. 뭔가 길을 보여주고 활로를 열어주도록 제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해요.”

● 음악성이 무시되다 보니 이효리 4집 음반 중 대부분이 표절로 판명되는 일도 생겼겠죠.

“난 누군지도 몰라요.”

● 멜로디가 중요하다고 하셨죠.

“서양은 하모니 음악이고 동양은 멜로디 음악이죠. 서양의 오케스트라는 화음을 쌓아 올리며 스크린 같은 평면에 펼쳐진다면, 동양음악은 단음으로 우주를 깊이 찍으며 정신적 공간을 확보하기 때문에 입체적이에요. 제가 다음 달 14일 광화문 복원 기념 전야제 행사에서 정명훈의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애국가를 협연해요. 그때 록 기타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해요.”

●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처음인가요.

“옛날에 ‘신중현 오케스트라’라고 만들어서 한 적은 있지만,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하긴 처음이죠. 새로운 음악성이 또 탄생할지도 모르죠.”

● 음악 인생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많죠 뭐. 후회의 연속이니까, 인생은. 시간이 지나 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구나, 하고 생각해요. 후회하다가도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걸 얻게 되니까요. 은퇴했을 때 후회를 많이 했죠. 그런데 은퇴 후 기타를 얻게 된 것은, 크게 새로 시작하는 마음을 주고 다시 의욕을 갖게 하는, 그런 운명이 나한테 있는 거라 생각해요. 혼자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헷갈려요. 계획을 세우겠다는 마음도 없고, 세워봤자 그렇게 가지도 않을 거고요. 장자의 사상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렇게 안 하면 지탱을 못 하거든요. 정석으로 뭔가를 해결할 능력이 저로선 없어요. 자연에 기대 물과 같이 흐르다가 어디까지 가는 줄도 모르고 가는 거예요.”

● 1968년 베트남으로 진출할 기회가 있었죠.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연단도 다 그리로 몰려갔어요. 저도 가기로 했는데, 펄시스터스 기념 음반 내 준 게 히트하는 바람에 제작자들이 못 가게 막았죠. ‘님아’가 뜨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게 됐어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죠. 신중현 사단까지 생기고, 가수는 구름같이 모여들고….”

● 가수를 볼 때 기준은요.

“목소리나 음악적 감각만 체크하고 제가 음악성을 주입시키는 쪽이죠. 한 소절씩 따라 부르게 가르치며 만드는 거예요. 자기들도 하라는 대로 했는데, 어느 날 보면 스타가 돼 있고, 그랬죠.”

● 창법도 혁신적이었죠.

“미8군 무대에서 접한 미국 팝뮤직 창법이죠. 클래식이나 국악이 나오던 시절엔 마이크가 없으니 배에서 우렁차게 소리를 내 무대를 꽉 차게 만드는 고전적 창법을 썼어요. 그런데 마이크와 시스템이 발달한 현대에선 창법이 달라지거든요. 소리를 웅장하게 할 필요도 없고, 몸에서 만들어내는 음을 오히려 흡수하는 쪽으로 발달시켜야 해요. 마이크 자체가 진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계와 마찰시키면 잡음이 나요. 기계와 문명과 문화는 같이 가는 거예요. 요새 신인가수들 보면 일본 창법을 많이 따는데, 잘못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가성을 써서 하는 게 아니라 들이마셔야 하거든요. 기형적인 창법이 돼 버렸는데 대중은 유행인가 보다 하고 흉내 내겠죠.”

● 무대에서 직접 노래하시는데, 가수가 부르게 할 생각은 없으세요.

“부르게 하고 싶죠. 그런데 멜로디 위주의, 굉장히 커브(선율선)가 많은 곡들이거든요. 뮤지션이 음악을 통달하고 부르면 되지만, 그냥 노래만 부르겠다는 사람 가지고는 힘든 거죠. 좋은 가수가 있어서 그런 능력을 갖고 하겠다면 얼마든 줄 수 있죠.”

● 언제 가장 행복하셨나요.

“행복이란 게 있겠어요? 그래도 제일 좋을 때는 미8군에서 음악 할 때였어요. 안 다닌 데 없이 다녔는데, 그땐 비포장도로라 가기도 쉽지 않고 오래 걸렸죠. 한참 달려서 들어가면 온몸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요. 우리가 도착하면 미군들이 달려나와 악기를 다 날라줘요. 그리고 샤워실로 안내하죠. 샤워하고 나면 밴드 전용 식당으로 가요. 거기서 프라이드 치킨이니 소시지니 이런 걸 처음 먹어봤어요. 뷔페가 뭔지도 모를 때니까 미련하게 접시에 듬뿍 담았다가 배가 불러 반도 못 먹고 버리고 그랬어요, 그 사람들은 기타만 봐도 좋아하니까, 기타 솔로를 연주하면 다들 쓰러지는 거예요. 맨 처음 기타 솔로를 연주했을 때, 잔뜩 떨려서 기타만 보며 고개를 숙인 채 있는데, 옆에 있는 베이스가 발로 툭툭 치더니 고개를 들어보래요. 모두 서서 기립박수를 치고 있더라고요. 뮤지션을 대접할 줄 알고,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이 열광하니 그 이상의 즐거움은 없죠.”

● 신중현 사단 시절도 비할 바 못 되나요.

“통, 뭐…. ‘야쿠자’ 투성이고, 뭔가 얻어먹을 거 있나 하고 모이고. 일단 복잡한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매일 사람들 하고 상대한다는 게 나는 굉장히 불행하더라고요. 음악만 조용히 하고 싶은 사람인데…. 사무적으로 처리할 일이 많이 생기고 이러면 음악적 감각이 달아나고, 개인적으론 불행한 거죠.”

● 활동금지 때보다야 낫지 않았나요.

“그건 절망이고요. 인생이 끝난 거였죠. 내게서 음악을 뺏어가면 아무것도 없는데. 난 아무것도 아니죠. 살인이죠, 살인.”

은퇴 뒤 새 기타 얻게 된 것으로 크게 새로 시작하고 싶어졌어요
장자 사상 매우 좋아해요
자연에 기대 물처럼 흐르다가 어디까지 가는 줄도 모르고 가는 거예요

● 펜더 기타는 몇 대나 사셨어요.

“나도 몇 개나 샀는지 잘 모르겠네요. 살림이야 어떻게 되든 좋은 기타가 있다고 하면 사들였으니까. 공연하면서 많이 부수기도 했고요. 나중엔 직원들이 지키고 섰다가 던지면 쫓아가서 받더라고요. 기타가 비싸니까요. 지금은 5~6개쯤 남았어요. 아들들이 ‘아버지는 이제 다른 기타는 안 치실 거 아니냐’면서 보이기만 하면 집어가요. 좋은 음악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야…. 오히려 안 가져가는 게 더 염려스러운 일이죠. 그렇지만 이 기타만은 안 되죠. 내 이름이 쓰여 있으니까요. 이걸 한번 잡아보면 다른 건 치고 싶지 않아요. 나중엔 박물관에 가겠죠.”

●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건가요.

“이런 기타가 존재한다는 건 기적이죠. 이건 표현하면 표현하는 대로 받아줘요. 다른 기타는 한계가 있어서 소리가 예쁘다 해도 어느 정도를 넘어서지 못해요. 그런데 이건 못 치면 못 치는 대로, 잘 치면 잘 치는 대로 그 표현력이 무한대예요.”

● 왜 기타여야만 했나요.

“서양의 클래식은 악보로 표현되는 음악이잖아요. 그런데 기타의 초킹(줄을 끌어올리거나 내려서 음정을 조절하는 주법) 같은 건 악보에서 표현할 수 없어요. 악보를 벗어난 음악인 거죠. 전자장비를 이용해서 음을 증폭하니까 표현의 영역도 무한대로 뻗어나가고요. 국악, 동양의 음악은 전자적으로 증폭하는 장비가 없으니 그냥 옛날 모양 그대로의 소리에서 머물 뿐이고요. 기타만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도 없죠. 기타는 멜로디에, 전자적인 현대적 음악의 표현을 할 수 있으니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거예요. 밴드의 실력도 기타리스트의 역량에 의해 가늠되고요. 그런데 유튜브에 올라 있는 기타 연주들을 봐도 현란한 손가락의 움직임만 있지 진짜 기타 소리는 아니더군요. 그건 일종의 쇼죠. ‘이게 바로 기타 소리다’라는 걸 들려줘야죠.”



j 칵테일 >> 세상에 하나뿐인 이 기타

1946년 설립된 미국 펜더사는 자사의 기타를 애용하며 전설적인 음악을 만든 뮤지션에게 특별히 기타를 만들어 헌정해 왔다. 지금까지 에릭 클랩턴(영국), 제프 벡(영국), 스티비 레이 본(미국), 잉베이 맘스틴(스웨덴), 에디 반 헤일런(네덜란드), 신중현이 헌정 기타를 받았다. 맞춤형 모델을 만드는 펜더 커스텀 숍에서 기타리스트를 위해 특별 제작한 단 한 대뿐인 기타.

신중현의 헌정 기타: 기타 장인인 ‘마스터 빌더’ 데니스 갈루즈카가 만들었다. 지판에는 신중현의 사인과 ‘Tribute to Shin Joong Hyun’이란 글씨가 자개로 새겨져 있다. 신중현씨는 “지미 헨드릭스가 1960년대 말 쓰던 스타일로 만들어달라. 나도 낡았으니 기타도 같이 낡아야 어울린다”고 주문했다. 펜더는 낡은 모서리, 녹슨 너트까지 표현했다.

몸체(body): 나무는 구주물푸레나무(Ash). 펜더의 보디는 Ash 혹은 Alder(오리나무)로 만든다. 애시가 앨더보다 무겁지만 소리는 밝고 찰랑거린다. 색상은 검정. 보디 위쪽을 덮는 플라스틱 재질의 픽 가드(Pick Guard)는 통상 보디와 대비되는 색깔을 쓰는데, 신씨는 독특하게도 동일한 검은색으로 골랐다. “기타도 색깔마다 소리가 다릅니다. 하얀색은 소리를 좀 쳐내는 경향이 있지만 검은색은 모든 소리를 빨아들여요. 블랙홀처럼 우주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겠다는 뜻에서 검은색으로 주문했어요.”

목(Neck): 지판을 최대한 넓게 해달라는 것도 신씨의 요구사항이었다. “폭이 좁으면 초킹 등의 표현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보통의 기타보다 목이 두껍고 지판도 넓다. 소재는 단풍나무(Maple).

가치: 비슷한 사양의 펜더 기타가 통상 2000만원대에 팔린다. 그러나 희소성은 가치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한다. 에릭 클랩턴이 쓰던 1956년형 펜더 블랙키가 2004년 크리스티 자선 경매에서 약 95만9000달러(약 11억원)에 낙찰돼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타로 기록됐다.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 있는 연습실. 거장의 연습실치곤 허름하고 소박했다. 크기가 서로 다른 판자를 이어 만든 담장, 비닐을 덧댄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2005년부터 직접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으며 짓기 시작한 집이다. 언제 완성할 수 있을지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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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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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現] 가수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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