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300조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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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약 3백조원의 시중자금이 갈 데를 몰라 방황하고 있다.

은행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데다 4월 이후 주가가 약세여서 투자자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부동산값이 오를 만큼 올랐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데다 정부의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이 계속 나오고 있어 부동산으로 몰리는 자금도 주춤하고 있다.

KTB자산운용은 한국은행의 자료(금융시장 동향)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7월말 현재 금융권의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부동자금은 2백98조원대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고 21일 밝혔다. 이는 금융기관 총수신고(약 7백50조원)의 39% 가량을 차지하는 것이다.

금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후 단기 금융상품에 자금이 대거 몰리고 있다. 특히 이달 들어 15일까지 입출금이 자유로운 은행의 시장금리부 수시입출금식 예금(MMDA)에만 2조3천8백억원이 새로 들어왔다. 7월말 현재 수시로 입출금이 가능한 은행 예금에는 무려 1백29조원이 들어 있다.이는 자금을 잠시 묻어두기 위해 단기 상품을 찾는 투자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신한은행 김태완 프라이빗뱅킹팀장은 "부동산 정책 방향을 좀 더 확인하고 투자하려는 대기성 자금이 머니마켓펀드(MMF)나 MMDA 등 입출금이 자유로운 금융상품에 몰려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기 부동자금은 부동산과 골프회원권 등 실물자산을 선호했다. 이 바람에 부동산과 골프회원권 가격이 급등했다. 예컨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J사장은 은행에 묻어뒀던 자금으로 지난해 8월께 경기도 용인 S골프장의 회원권을 2억원대에 사들였다. 현재 이 골프회원권 가격은 3억원선을 넘었다. 그러나 최근엔 아파트값 등이 너무 올라 실물자산을 찾는 자금규모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이로 인해 부동자금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은행 서초PB센터 김우신 팀장은 "단기 금융상품에 몰렸던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며 "최근 고액 자산가들이 부쩍 주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뿐 아니라 각종 연기금과 금융기관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애먹고 있다. 회사채 발행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1999년 이후 지난달까지 회사채는 순증 발행된 적이 없었다. 즉 신규 발행보다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재발행하지 않고 갚아버린 금액이 많았다는 의미다.

이로 인해 채권시장의 거래금액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20조원 가량이었으나 최근 5조~6조원 규모로 줄었다.

새마을금고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회사채를 구하지 못해 금리가 낮은 통화안정채권을 사들이고 있다"며 "그나마 공급물량이 충분치 못해 애를 먹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희성·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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