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가 죽어가고 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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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는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 실패한 것이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붉은 악마'나 '4강 신화'를 한글로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켜야 했다.한글이 세계인들에게 하나의 국가적 상표로 뜰 수 있었는데, 그리하여 우리의 최고 문화상품이 한글이 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너무나도 통한스럽다. 그것은 한글에 대한 애정 없이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남용하는 우리의 안타까운 언어 현실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말은 새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새 어휘들은 '조폭'이나 '막가파'처럼 부정적인 말이거나 마구잡이로 끌어다 쓰는 영어들 뿐이다.'노하우·시너지·컨설팅·벤처·컨소시엄·어젠다·온라인·오프라인 등등'. 영어가 무차별적으로 몰려와 주도적인 '외래어'로 자리를 잡는다. 심지어 '싸랑해요. 엄마'의 경우, 아예 우리 말의 어순과 발음까지도 영어식으로 바꾸고 있다. 어문정책은 사라진 지 오래다.

과거 한자가 차지했던 지위를 이제는 영어가 누리고 있다. 옛날 지식인들이 한자를 독점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영어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은 이래저래 하위언어나 보조언어가 돼가고 있다.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마치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세계화 시대에 낙오되는 양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다. 새 경제질서와 엄혹한 신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이기는 길은 영어뿐이라고 난리를 치고 있다. 이제 세계는 하나라며 지역적인 것을 버리고 세계화의 물결에 합류하자고 목에 힘줄을 세운다.

보라, 세계가 하나인가? 미국이 우리인가, 우리가 미국만큼 땅이 큰가, 군사력이 막강한가, 문화가 같은가, 음식이 맞는가, 무엇이 같다는 말인가. 같음을 강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온갖 다양성을 산술적으로 평균화시키거나 통합시키는 것은 군국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는 일이다. 아울러 서로 다른 것들에 등급을 매기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역시 시대착오적 발상에 불과하다. 오늘의 세계를 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바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서로 다른 언어, 다양한 문화적 차이, 사유방식과 관습의 불일치 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어는 한 시대의 가치를 담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늘 역동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언어의 그 역동적 변화는 살아 있는 언어 주체의 몫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 돼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좋은 그림에 대한 꿈이 그 누구보다도 크다고 자부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우선 재능을 타고나야 하겠고, 그것을 갈고 닦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를 통해 무엇인가 이루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갖췄다 해도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없다면 결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즉, 세계를 올바로 인식해야만 자신의 능력을 올바르게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면, 일제시대의 친일 예술인들처럼 오히려 사회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을 말과 글이라고 생각한다. 불립문자(立文字)라는 세계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인간의 사회인식이나 현실인식은 대부분 그 집단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의해 좌우됨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로 말하면 국어다.

내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우리의 언어생활을 얘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 말이 바로 서지 않는 한 내 그림 또한 결코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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