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재는 '새로운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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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970년대 이후 저자 강만길(69·상지대 총장)교수가 펴냈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현대사』 등은 '책, 그 이상'이었다. 실증주의 방법론을 금과옥조로 알아온 학문풍토, 또 그 안의 '가치중립이라는 진공'상태 속의 역사학계에 그의 책은 '학문적 죽비'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고대사·중세사에 쏠려있던 편식구조를 바꿔 현대사에 대한 균형잡힌 관심을 촉구한 것, 우리 시대를 '분단시대'라는 역사학 용어로 규정하는 비판적 접근 등은 지식사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기폭제였다.

구체적으로 강교수의 저술은 오늘의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형성된 모태인 80년대 학술운동의 계기이기도 했다. 변화된 2000년대 상황 속에서 원로 강교수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볼 수 있는 새 책이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이다. 기본적으로 사론집이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세상 사람들의 역사를 보는 눈을 조금이라도 높여야 한다는 사회봉사의 차원"(머리말)에서 서술돼 읽어내리기 부담스럽지 않다. 논쟁적인 테마도 적지않다.

20편 글 모음 중 '20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통일사관의 수립을 위하여' '동아시아공동체의 전망과 한민족 사회' '6·25 전쟁, 어제와 오늘과 내일' 등이 저자의 목소리가 분명해 논쟁을 부를 만한 글들이다. 기본적으로 강교수가 역사를 보는 눈이 예전과 변화가 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아니 외려 앞으로 내달린다. 이를테면 6·25 혹은 한국전쟁이란 기존 역사용어 대신 '통일전쟁'이라는 새 용어로 대체하자는 제안, 그걸 토대로 분단 50년을 회고하고 적극적 통일사관의 제안으로까지 가지를 쳐나가는 것이다.

가령 1950년 전쟁을 '6·25사변'(북쪽에 의한 남침임을 강조하는 한국 용어)이나 '한국전쟁'(국제학계 'Korean War' 번역어) 또는 '조국해방전쟁'(북한의 용어)으로 부르는 것은 모두 적절치 않으니 '통일전쟁'이란 용어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관심거리다. "6·25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보면 그 뒤에는 증오와 복수심이 따르게 마련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이 전쟁은 침략전쟁으로 보기보다 통일전쟁으로 볼 수 있다. 분단돼서는 안될 조건의 한민족사회가 한때의 악운으로 부자연스럽게 갈라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한 전쟁으로 바라보자"(1백83쪽)는 것이다.

이념에 고착되거나 체제옹호 쪽의 6·25 인식을 넘어서려 하는 의도는 이해 못할 것 아니나, 강교수의 글은 '마음이 앞선 서술'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쪽의 접근이 적지않게 공소하거나 추상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역사학의 영역을 넘어선 정치철학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는 지난 20세기 이후 냉전 해소에 이어 '동아시아 공동체의 형성→한반도의 평화 통일'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지만, 그것은 '예견'수준이다.

"더구나 21세기에 들어가며 민족국가 사이의 국경이 낮아지고 인류사회 전체를 통해 정치공동체보다는 경제 공동체나 문화 공동체의 역할이 더 우세해질 것이라 생각하면, 21세기 동아시아의 일각에 국경을 넘은 한민족 공동체의 성립을 전망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아세안(ASEAN)보다도 더 결속력이 강한 동아시아 공동체가 성립될수록 이 한민족공동체의 형성은 더 쉬워질 것이다"(1백21쪽)

심지어 저자는 '평화적으로 통일된 한반도'는 주변의 그 어느 국가라도 방해할 명분이 없다는 단언도 내리고 있으나 그것이 한반도 지정학에 대한 정밀한 분석 없이 이뤄지고 있다.

물론 저자의 겸양의 말이지만, 예전 분단시대라는 역사규정은 "탄탄한 역사관"을 기저로 한 것은 결코 못되었고, "역사학이 민족사적으로 부정적인 이시대 역사학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75쪽)으로 유효했다. 그 연장선의 이번 사론집에도 똑같은 지적을 다름 아닌 독자들에 의해 받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도 불가피하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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