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번다고 한쪽 쫓겨나 결혼이 해고 사유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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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죄입니까? 아니면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난 것이 죄입니까? 해고 당시 제 나이는 26세. 퇴직하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였습니다. 우리는 결혼한 지 채 15개월을 넘기지 못한,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으려면 너무나 먼 길을 가야 할 맞벌이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고된 이유는 우습게도 상대적 생활안정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만두지 않으면 남편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고 협박했습니다.6백88명의 아내사원들은 지금도 눈에 밟히는 일터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99년 농협 사내부부 해고자)

X세대에 속하는 한 한국 여성의 자화상이다.

흔히 여성의 사회참여를 가늠해 보는 척도로 여성취업인구, 남녀 임금비교, 여성의 교육기회 등을 들춰본다.

요즘 미국에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인 X세대 여성의 경제·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향상된 모양이다. 올 미국 노동통계국(BLS) 발표에 따르면 25~34세 사이의 여성들의 평균임금은 같은 연령대 남성들의 82%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X세대 여성은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당 37.9시간씩 신명을 바쳐 일하고, 51%가 간부직 이상 직책을 맡아 척척 처리해 내고 있다고 한다. 사회활동에 혼인 여부는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 전체 기혼여성의 70%가 직장을 갖고 있다니 말이다.

유럽의 여성들은 어떨까? EU 통계국(EUROSTAT)이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자. 그리스·스페인·이탈리아의 경우 40~50%가 맞벌이를 하고 있고, 프랑스·네덜란드·오스트리아·포르투갈·영국의 경우 3분의2 이상이 맞벌이 부부다. 또 그 수는 해마다 늘어 최근 10년 사이에 네덜란드 20%, 스페인 12%, 벨기에와 아일랜드가 각각 10%씩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맞벌이 부부라서 상대적 생활안정자로 추정돼 어느 한쪽이 일터를 떠나라는 강요를 받았다는 보고는 없다. 오히려 가정과 직장을 양립하며 살고 있는 가정이 얼마나 늘고 있나? 자녀가 있는 부부 중에 맞벌이와 그렇지 않는 경우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자녀를 둔 부부의 취업형태가 모두 full-time인가, 아니면 어느 한쪽은 part-time인가를 분석한 통계들을 내놓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부부의 삶의 방식은 그 국가의 고용·보육·여성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농협 사내부부 해고사건은 지금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예비취업자인 여대생들은 거센 피켓 항의를 했었고, 지난 7월 말부터 여성단체 회원들과 여성학자들의 대법원 앞 1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X세대 여성은 아직도 '남성은 사회적 노동을,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이라는 고정관념의 노예가 돼야 하나? 여성의 사회진출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하는 한 '우먼 코리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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