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살리기'1,200억 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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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교육부와 학술진흥재단이 추진해 최근 매듭 지은 '기초학문육성 주요사업' 선정 작업은 지원 규모가 1천2백여억원에 달하는데다 1천2백여명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 대학가에서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월 신청 공모가 시작된 이후 일부 대학에선 미취업 박사 학위자를 끌어들여 지원금을 받으려는 전략까지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벼랑의 인문학 등 기초학문 연구자들 숨통 튼다=대학가에서 기초학문 연구자들이 고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해 어려움을 당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어렵사리 박사학위를 받고서도 기초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일이 흔했을 정도다.

서울대 한 인문학과 교수는 "박사인 제자가 시간 강사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내가 사표를 내고 교수 한 자리라도 마련해 후배들에게 넘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며 이번 결정의 의미 부여에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 기초학문의 위기가 이같은 정부 주도의 일회성 처방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수많은 미취업 박사들을 사업별로 계열화해 인문학 발전의 싹마저 고사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세밀한 전공 차이를 무시하고 사업별로 계열화함으로써 각자의 전공연구를 오히려 소홀히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과 달리 전공이 더욱 세분화하는 추세인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경우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탈락자 후유증 최소화에 관심 둬야=탈락자들이 반발할 소지가 있어 약간의 후유증도 예상된다. 하지만 이번 선정의 1차적 기준은 '기초학문 적합성 여부'에 있는 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심사 작업에 관여했던 한 교수는 "기초학문과 상관없이 단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신청한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면서 "1차 심사와 7월초에 이뤄진 면접심사에서 상당히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심사에 대규모 전문인력을 투입한 것도 투명성과 공정성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 학술진흥재단 실무자에 따르면 1차 심사에 학계 각 분야의 전문가 4백여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면접심사도 5개 소위원회 60여명이 참여했다. 심사기간도 50여일에 이르고 신청기관이나 참여 연구자의 소속·지역을 무시하면서 전공자 안배에 주력했다. 9월 중 신청서류의 사실 확인과 현장 실사를 통해 사후적으로 취소 결정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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