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만원권 지폐 만들어야 : 수표 유통비용 年 1조 줄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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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주로 심야 시간대에 장사를 하다보니 수표를 일일이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대문·남대문시장에서 장사 좀 해본 사람은 누구나 사고·부도 수표로 인해 손해본 경험이 있게 마련이죠. 고액권이 나오면 시장 상인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동대문시장에서 20년간 여성복 도매업을 해온 모(48)씨는 고액권 발행에 대해 "지금도 늦었다"고 말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대개 무신경하게 넘어가서 그렇지, 가게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냈다가 거절당해 낭패를 보는 등 고액권 화폐가 없어서 겪는 불편은 의외로 크다"며 "국민의 생활 편의를 개선하는 차원에서 고액권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승 한은 총재도 최근 고액권 발행 여부와 함께 통일에 대비한 남북한 화폐 통합, 화폐 단위를 전체적으로 바꾸는 디노미네이션 등을 3대 장기 과제로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는 필요성이나 예상되는 비용과 부작용 등을 고려할 때 이 중 고액권 발행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낭비되는 비용=최고액권인 1만원짜리를 갖고는 한 가족이 외식도 못하게 되면서 일상 생활에서 10만원짜리 수표가 현금 구실을 한 지 이미 오래다.

은행 현금자동출납기(ATM)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현금처럼 뽑아쓸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수표는 현금과 달리 은행에 입금되면 곧바로 폐기 처분된다. 10만원권 수표의 경우 보통 발행 후 7일 정도 유통된 뒤 수명을 다하게 된다.

10만원권 수표의 용지값은 장당 24원으로 지폐의 제조원가(1만원권 약 70원)에 비해 싸지만 지폐의 수명이 2년(1천·5천원권)~4년(1만원권)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은 지난해에만 한국조폐공사에서 10만원권 수표용지를 12억8천만장 구입, 용지 값으로만 3백여억원을 썼다.

발행한 수표가 은행에 들어오면 교환작업(수표의 발행-수취 은행 간 정산작업)을 거쳐 5년 동안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보관한 뒤 폐기 처분해야 해 각종 부대비용은 더 많이 들어간다.

은행연합회 윤용기 상무는 "각 은행은 자기앞수표 관리 원가를 1천1백~3천2백원으로 계산하고 있다"며 "수표 취급량 중 10만원권 비율이 75~80% 정도인 것을 고려할 때 10만원권 수표 사용으로 인한 비용으로 최소 연간 1조원은 부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액권 발행의 효과=우선 10만원권 수표가 사실상 최고액권 역할을 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기피 대상이 되기 일쑤여서 벌여야 했던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또 10만원권 수표를 창구에서 발급받을 때마다 내는 건당 50~1백원의 발행 수수료와 다른 지역에서 발행된 수표를 입금할 경우 내야 하는 1천~2천원의 추심 수수료 부담을 덜 수 있게 된다.

조흥은행 관계자는 "현금자동지급기를 이용하는 고객이나 단골 고객에게는 수표 발행 수수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10만원권 수표 업무와 관련해 우리 은행에서만 연간 40억~50억원의 손해가 생긴다"며 "이같은 손해는 다른 수수료나 대출 이자에서 보전하게 되므로 결국 고객 부담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10만원권 지폐가 나오면 이같은 비용 감소로 수수료·대출 금리의 인하까지 유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은행 입장에서도 업무효율 개선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국민은행 최범수 부행장은 "은행에서 병목현상이 가장 심한 곳이 창구인데 10만원권이 발행된다면 창구 직원의 업무효율이 높아져 은행의 수익성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인실 박사는 "화폐는 무엇보다 교환이 편리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며 "이미 10만원권 수표 사용이 보편화한 만큼 이를 화폐로 대체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서강대 전성인(경제학)교수도 "10만원권을 발행하면 안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며 "10만원권 발행으로 줄어드는 사회적 비용은 심리적 측면에 불과한 부작용에 비하면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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