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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조원 빚더미 눌린 LH공사 ‘전면 재검토’ 통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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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03면

구로구 서울디지털산업 1단지의 에이스하이엔드타워 건물에서 내려다 본 가리봉뉴타운의 전경. 사진 앞쪽 가운데 회색 건물이 토지주택공사가 운영하는 뉴타운 홍보관이다. 신동연 기자

가리봉뉴타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대박’을 향한 열망은 이미 식어버렸다. 사업추진은 완전 중단됐다. 다른 뉴타운처럼 동의서를 받으러 바쁘게 돌아다니는 OS(외주업체) 요원이나 공사장비의 요란한 소음은 이곳에선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한낮인데도 거리엔 지나다니는 사람이 뜸해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TV를 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시장 상인들은 “손님이 줄어 장사가 안 된다”며 투덜거렸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뉴타운 사업 무산 위기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125번지 일원의 가리봉 재정비촉진지구(뉴타운). 총 면적이 33만㎡(약 10만 평)에 달해 ‘기성 시가지를 대상으로 하는 단일 사업구역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서울시 1월 26일자 보도자료)’다. 정보기술(IT) 관련 중소·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 1단지와 2, 3단지의 사이에 자리잡은 주택가로 예전에 ‘벌집촌’ ‘쪽방촌’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던 2003년 11월 낡고 허름한 집이 많아 주거환경 정비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1차 균형발전촉진지구(중심지형 뉴타운) 5곳 중 하나로 지정했다.

가리봉뉴타운이 특별한 것은 주민 조합이 아니라 공기업이 사업의 주체라는 점이다. 구로구는 2006년 주민 동의를 받아 주택공사(이후 토지공사와 합병)를 사업 시행자로 지정했다. 주민들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조합 대신 공기업이 나서면 사업진행이 원활할 것으로 판단해서다. 서울에서 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을 맡은 뉴타운은 가리봉이 유일하다. 그러나 공기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었다. 현재 LH는 재정난을 이유로 가리봉뉴타운의 사업성을 전면 재검토 중이다. 구로구는 LH와 협상 결렬이란 최악의 상황까지 걱정하고 있다. 이 경우 가리봉은 서울시 35개 뉴타운 중 처음으로 사업이 무산되거나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구청장’ 취임 뒤 문제 불거져
올 초까지만 해도 사업진행은 순조로웠다. LH는 가리봉뉴타운에 ‘카이브(KAIV·Korea Advanced&Innovative Valley)’란 이름을 붙이고 2015년까지 2조~3조원을 들여 대규모 업무·상업 중심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놨다. 서울시는 1월 28일자로 가리봉뉴타운 개발계획(재정비촉진계획)을 확정해 시민들에게 알렸다. 구역 한가운데 53층짜리(높이 200m) 랜드마크 타워를 올리고, 그 주변으로 호텔·전시장·사무실·쇼핑센터·공연장 등 복합시설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 주변에 무역센터(55층)와 전시장·호텔·쇼핑몰 등이 집중돼 테헤란밸리 기업들의 각종 비즈니스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구로디지털밸리에선 카이브를 산업지원 기능의 거점으로 키운다는 구상을 담고 있었다. 1120억원을 들여 남부순환도로 고가차도를 철거한 뒤 지하도로(975m)를 신설하고 원주민과 IT 관련 종사자를 위한 아파트 5430가구와 오피스텔 1389실도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4월 중순 구로구청에 날아든 LH의 공문 한 장이 순식간에 상황을 뒤집어 버렸다. 구로구에 따르면 LH는 4월 15일자 공문에서 “사업환경 변화에 대응한 별도의 ‘사업성 개선방안 검토’ 계획이 있다”고 통보했다. 쉽게 얘기하면 ‘이대로 계속 사업을 벌이기엔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는 뜻이다. LH는 ▶토지·주택공사의 통합 이후 자금사정 악화 ▶국제적인 금융위기로 인한 건설경기의 위축 ▶주변 대규모 복합단지 건설을 환경변화의 이유로 들었다.

이때는 6월 2일 지방선거를 한 달 반 정도 앞둔 민감한 시점이었다. 구로구는 쉬쉬하며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해당 주민들이 동요해 표심에 영향을 줄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양대웅 구로구청장은 한나라당 소속으로 3선을 노리고 있었다. 선거 결과 현직이었던 양 구청장은 떨어지고, 서울시 본부장 출신인 이성(민주당) 후보가 2만여 표 차이로 구청장에 당선했다.

선거가 끝나자 그동안 물 밑에 가려져 있던 가리봉뉴타운 문제가 물 위로 떠올랐다. 이성 구청장은 당선 후 잇따라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가장 시급한 지역현안으로 가리봉뉴타운을 꼽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가리봉 재정비촉진계획이 오랜 진통 끝에 올 초에야 마련됐지만 현재 시행자인 LH의 재정 문제로 사업이 전면 재검토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인터뷰에선 “7~8년간 사업을 추진해온 주택공사(현재 LH)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손을 떼버린 상태”라고 토로했다. 그는 또 “가능하면 주공이 계속 추진할 수 있도록 협상을 이어갈 것”이라며 “하지만 주공과 협상이 결렬된다면 새로운 사업방식을 찾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LH의 가장 큰 고민은 재정난이다. LH의 빚은 2003년(20조원) 이후 지난달 말(118조원)까지 100조원 가까이 불었다. 세종시를 포함한 각종 신도시 사업과 국민임대·보금자리주택 건설, 4대 강 사업 같은 대형 국책사업에서 막대한 보상비 등을 떠맡은 것이 주원인이다. 판교신도시 개발자금에서 5200억원을 빌렸던 성남시가 일방적으로 천천히 나눠 갚겠다는 ‘지불유예’를 선언하고, 판교 중심상업지를 복합 개발하는 ‘알파돔시티’ 사업이 무산 위기에 놓인 것도 LH의 재정난을 부채질한다.

현재 LH는 가리봉뉴타운을 비롯해 그동안 벌였던 각종 사업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추진할 사업과 당분간 보류하거나 연기할 사업을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조만간 결론이 나오겠지만 앞순위에는 주로 국책사업이 들어가고 나머지 사업은 뒷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 LH는 가리봉뉴타운에서 함께 사업을 벌일 투자자도 찾고 있다. 자체 자금만으로 사업을 벌이기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건설경기 침체로 투자자 모집의 전망은 밝지 않다. 이성 구청장이 협상 결렬 가능성까지 언급한 배경이다.

LH와 구로구는 모두 가리봉뉴타운과 관련한 중앙SUNDAY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다만 LH 관계자는 “가리봉 사업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들인 공을 생각해서라도 아주 포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진행 일정이 늦어질 수는 있다”며 “구청에서 사업성을 높일 대안을 제시하면 좋겠지만 현재로선 별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로구 관계자는 “가리봉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지정한 ‘MB표 뉴타운’인 만큼 정치적 해법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가리봉동은 박영선(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인 구로을에 속한다. 구청장과 지역구 국회의원이 모두 야당 소속이다. 한편 LH 관계자는 “이미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 시절부터 진행됐던 일”이라며 “정치적인 고려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대출 안고 투자한 사람 부담 클 것”
14일 가리봉뉴타운 현장을 찾아갔다. 은빛 외벽이 햇빛에 반짝이는 3층짜리 LH 홍보관은 붉은 벽돌의 오래된 주택가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1층 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자 안내원 두 명이 친절한 미소와 함께 모처럼 찾아온 방문객을 맞았다. 한 안내원은 “홍보관 문을 연 지 2년 정도 됐다. 그동안 많이 다녀가서인지 요즘엔 방문객이 뜸하다”고 전했다. 3층 영상관에서 안내원이 스위치를 올리자 랜드마크 타워를 중심으로 새로 들어설 고층건물의 모형이 울긋불긋한 조명으로 반짝거렸다. 이어 가리봉뉴타운의 ‘눈부신 미래’를 약속하는 짧은 동영상을 보여줬다. 2층은 ‘미래도시’를 주제로 만든 공간이었다. 거리를 걸어다니며 자유자재로 첨단 IT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문화거리’ 등이 인상적이었다.

홍보관을 나와 골목길로 접어드니 ‘딴세상’에 온 기분이 들었다.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미로를 연상케 했다. 대부분 3층 이하의 다가구·다세대 주택으로 페인트칠이 온전한 곳이 드물었다. 슬레이트 지붕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곳도 간혹 눈에 띄었다. ‘월세 있습니다’란 종이가 붙은 집에는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각각 조그만 싱크대가 딸린 방 8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는 한 곳뿐인 듯했다.

언덕을 오르다 발견한 어느 집에선 한낮인데도 남자 넷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입자라는 이들은 일거리가 없어 삶은 감자와 토마토를 안주 삼아 시간을 때우고 있다고 했다. 뉴타운 얘기를 꺼내자 한 남자는 “몇 푼 안 되는 이사비나 받고 쫓겨나면 서울에선 더 이상 방을 구할 데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집에서 만난 세입자 맹모(61)씨는 “LH가 손을 떼면 민간업자에 넘길 텐데 그러면 보상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근처 가리봉 시장에서 수퍼를 하는 권모(52)씨는 “4~5년 전부터 이 동네에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다”며 “근근이 하루 벌이는 하지만 빨리 재개발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수퍼에서 장사하는 김모(67)씨는 “가리봉 시장 상권이 다 죽었다”며 “보상문제가 빨리 해결되고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돼야 상권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박경남(58)씨는 “그동안 LH가 사업을 맡은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주민 갈등이 적었다”며 “사업에 차질이 생기면 개발이익을 좇아 대출을 안고 투자한 사람은 최근 금리도 올라 부담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담벼락 곳곳에는 ‘비상대책위원회’ 명의로 붙인 벽보가 나부끼고 있었다. ‘현재의 가리봉 개발이 과연 가능한가. 진실을 밝혀라’는 요구사항이 적혀 있다. 비대위원장 박일안(58)씨는 “LH는 자금 사정이 어렵고, 구청은 뾰족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며 “주민들 사이에선 이미 신뢰를 잃은 LH보다 그냥 민간 사업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다”고 전했다. 민간 조합 방식으로 바꿀 경우에도 구역 지정, 동의서 확보, 조합 결성, 시공사 선정 등 넘어야 할 고비가 한두 개가 아니다.



균형발전촉진지구
뉴타운(법적 용어는 재정비촉진지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낡은 집을 헐어 주로 아파트를 짓는 ‘주거지형 뉴타운’과 대형 업무·상업 시설 위주로 재개발하는 ‘중심지형 뉴타운’이다. 서울시에선 ‘중심지형 뉴타운’을 균형발전촉진지구(균촉지구)라고 부른다. 서울시는 2003년 11월 가리봉동을 비롯해 청량리·미아·홍제·합정의 5곳을 1차 균촉지구로 지정했고, 2005년 12월엔 2차로 구의자양·천호성내·상봉의 3개 지구를 추가했다. 1, 2차 균촉지구 지정은 모두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이뤄졌다. 이후 오세훈 시장이 2006년 10월 세운상가와 주변 지역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면서 서울시 균촉지구는 9곳으로 늘었다.



이 기사는 장희재(연세대 졸업, 세명대 석사과정)·홍성환(한림대 4학년) 인턴기자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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