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카르데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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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터키와의 새 인연이 기분 좋게 맺어졌다.이을용 선수가 비싼 몸값을 받고 터키 프로축구팀에서 뛰게 된다는 소식이다. 월드컵 3·4위전에서 멋진 왼발 프리킥으로 그물을 갈랐던 그 선수다. 트라브존스포르 팀은 터키내 일급 선수들보다 많은 연봉 50만달러를 주고 이을용 선수를 스카우트 했다. 붉은 악마들이 초대형 터키 월성(月星)국기를 펼쳐보이던 그 감동이 8천㎞ 밖 무슬림의 가슴에 가 닿았음이 분명하다.

터키와의 인연은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2천년 전 한민족과 함께 만주 벌판을 달리던 돌궐족이 바로 터키인이다. 돌궐이 1천여년 전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면서 '투르크'라 불렸고, 그 영어식 발음이 터키다. 터키인들이 한국인을 '카르데시(형제)'라 부르는 역사적 근거다.

20세기 들어 터키인들은 한국인들을 '칸카르데시(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6·25 전쟁 당시 참전해 함께 피를 흘린 형제가 됐다는 의미다. 참전국 중 터키는 미국·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사자가 7백여명, 실종·포로가 4백여명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모두 자원해 달려온 지원병들이란 사실이다. 지금도 부산 유엔 묘지엔 4백62명의 터키군인이 백골로 누워 있다.

이후에도 터키와의 관계는 한동안 형제간처럼 동기상응(同氣相應)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탄불(터키의 수도) 대학생들은 27일 '혁명에서 희생된 한국 학생들을 추모하는 전문을 보내자'고 결의했으며, 28일부터는 자기 나라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들어갔다. 터키 대학생들의 시위에 맞춰 근대화를 약속하면서 등장한 세력은 군부였다. 귀르셀 육군사령관은 5월 27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다시 그로부터 1년 뒤인 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같은 군부 정권이었기에 80년대 초까지도 양국간 교감은 끊이지 않았다. 터키의 엘리트 관료들이 새마을운동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배우러 오기도 했다. 그러다 인연이 끊어진 것은 83년 터키가 먼저 민주화되면서부터. 독재정권이 민주정부의 모델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21세기 새로운 인연은 축구로 시작됐다.양국은 모두 민주화된 국가로, 나란히 준결승전에 오른 축구 강국으로 다시 만났다. 오랜 인연에 좋은 만남이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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