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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하고 싶은 것보다 잘할 수 있는 걸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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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젊은 독자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스물한 살 대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진로 문제에 관한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개인 사연을 들추는 게 썩 내키진 않지만,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젊은이가 많겠기에 소개하려 합니다. 그는 전공과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공을 선택하는 게 보다 안정된 길일 테지만, 힘들어도 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그 믿음이 흔들린답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를 생각하면,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선택할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는 거지요.

정당한 고민입니다. 요즘 젊은이들뿐 아니라 저희 때도 그랬고, 이전 세대들도 한번쯤은 다 했을 고민이지요. 모험 대신 안정을 택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면서도 미련과 회한이 남을까 두려운 거지요.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 모른다고요. 안정적인 길을 택한다고 꼭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고요. 그것이 무엇이든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이지요.

단, 하나의 조건을 달았습니다. 먼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게 있는 까닭입니다. 흔히 하고 싶은 일과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지요. 둘이 같다면 좋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고 꼭 잘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잘하지 못하면 아니함만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또한 잘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하고 싶은 일에 다가설 기회도 생길 겁니다. 처칠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처칠의 꿈은 정치였습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 처칠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질 못했지요. 이튼스쿨을 포기하고 들어간 해로스쿨에서도 3년 내내 낙제를 거듭해 1학년에 머물다 결국 군사반으로 옮겼습니다.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지만 성적이 좋아야 하는 보병대 대신 그가 선택한 건 기병대였습니다. 하지만 처칠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알았습니다. 그건 ‘글쓰기’였습니다. 남들 1년 하는 영어 수업을 3년이나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는 영문을 자유자재로 주물러 원하는 걸 만들어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는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지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섭니다.

장교로 임관하자마자 처칠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일간지에 르포 기사를 싣는 계약도 잊지 않지요. 처칠은 1895~99년 사이 쿠바와 인도·수단·남아공에서 싸우며 글을 씁니다. 신문에 썼던 기사를 바탕으로 책도 여러 권 내 돈도 벌었습니다. 물론 비난도 많이 받았지요. “영국군 장교와 저널리스트라는 지위를 남용했다”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특기인 글쓰기를 통해 동시대 젊은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습니다. 여세를 몰아 1900년 하원 선거에서 당선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성큼 다가선 거지요.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처칠이 무작정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면 건방지고 허풍 심한 그의 성격상 사람들의 반감만 샀을지도 모릅니다. 꿈에서는 더욱 멀어졌을 테고요.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그래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지요. 당연히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처칠은 말했답니다. “이 책으로 내게 우호적인 사람이 많이 생기진 않겠지만,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하게 쓰는 거야.” 전쟁터에서 솔직한 글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국의 치부를 드러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앞에서 눈을 감으면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니죠. 이슬람군에 대한 영국군의 가혹행위에 대해 처칠은 이렇게 쓴 적도 있습니다. “사령관의 무자비한 영혼에 부대원들이 감염되고 말았다.”

잘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려면 그만큼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제시대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다른 일본 전문가들이 비싼 중국의 도자기나 서화를 모을 때 값싼 조선의 민화와 민예품을 수집했습니다. 전문가들이 “돈이 없으니 그런 거나 모으지”라고 조롱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돈만 있으니 이런 걸 못 모으지.” 승부는 돈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보는 눈의 문제요, 곧 잘할 수 있는 것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은 보너스도 얻게 됩니다. 평화상이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처칠이 그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