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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핵무기 실험 … 지구촌에 ‘핵 공포’의 시대 시작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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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아라마고드에서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이 진행되는 모습.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맨해튼 프로젝트하에 최초의 핵실험이 진행되었다. 맨해튼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계획의 이름이었다. 이는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해진 아이젠하워와 질라드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독일의 나치보다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핵무기 개발은 1930년대 초 영국이 처음으로 추진했다. 중성자의 존재와 핵분열을 통한 엄청난 폭발력이 과학계에 알려지면서 독일과 일본 역시 개발을 꾀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결국 미국이 가장 먼저 만들게 되었고, 미국은 이를 실제로 사용하는 불명예마저 얻게 되었다.

1945년 5월 오펜하이머·페르미·로런스·콤프턴 등 4명의 과학자는 핵폭탄 사용 문제를 논의했다. 핵폭탄은 죽음의 무기지만, 역으로 전쟁을 끝내고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결국 네 사람은 핵무기 실험만으로 효과를 볼 수 없으며, 실전에 투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맨해튼 계획으로 세 개의 폭탄이 제조되었는데, 첫 번째가 7월 16일의 실험에 사용되었고, 두 번째 폭탄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사용되어 14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마지막 폭탄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7만여 명이 사망했다. 원자탄은 폭파 당시 사망자뿐만 아니라 방사선 발생으로 인한 피폭자의 문제가 심각하고, 이로 인해 일본인뿐 아니라 일본 내 많은 한국인들 역시 지금까지 피폭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반인륜적 무기를 만드는 데 공헌한 과학자들은 평화를 위해 만든 노벨상을 받았다. 핵무기의 원리를 발견한 채드윅이나 페르미와 한은 물론, 맨해튼 계획에 직접 참여한 맥밀런·파인먼·램지 등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핵무기의 실전 사용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으며, 독일·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해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과학자들의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페르미는 수소폭탄 개발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냉전시대를 통해 이후 핵무기는 군사적 수단이 아닌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인류 전체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해튼 계획은 전범국인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으며, 일본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도록 했다. 또한 핵은 강대국의 상징이기 때문에 많은 약소국들이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핵을 이용한 테러의 위협 역시 높아가고 있다. 핵은 억지력을 발휘하던 냉전시대보다 탈냉전 이후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