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된 80년대'민중미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여기 1980년대에 우리 눈을 사로잡았던 이미지들이 있다. 판화가 오윤(1946~86)이 '검은 테'와 칼칼한 칼맛으로 창조한 민중의 노래, 걸개 작가 최병수(42)씨가 최루탄이 터지던 현장에서 광목에 그린 '한열이를 살려내라', 미술운동패 중 하나였던 '가는패'가 함께 제작한 '노동자'가 파노라마로 펼쳐친다. 이 '팔십년대 그림판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격변기에 미술로 현실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했던 작가와 작품의 발자취를 한 호흡으로 꿰고 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이 붙어 87년 6월 항쟁에서 절정을 이뤘던 이 참여파 화풍을 사람들은 '민중미술'이라고 불렀다.

19일부터 8월20일까지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유준상)에서 열리는 '2002 소장작품전'은 오랜 만에 수장고에서 걸어나온 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지난 5월 옛 대법원 터로 이전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이 앞으로의 수집 방향을 내비치는 자리로도 뜻깊다. 2001년 가나아트(대표 이호재)가 리얼리즘 계열 작품 2백점을 기증하면서 더욱 힘을 얻은 미술관 쪽은 80년대 민중미술을 집중해 모으고 전시·연구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독특한 성격을 구축한 현실주의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으며 변모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김기린·윤명로·박서보씨 등 70년대 이후의 화단 주류 세력을 이뤘던 추상주의 작품들로 이뤄진 1부에 이어 2부 현실주의가 연결됨으로써 형식주의에 대비되는 '삶과 현실에 근간을 둔 내용 우위의 미학'이 어떻게 자생하게 됐는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현실과 발언' 동인이었던 김정헌·김용태·임옥상·박불똥씨의 출품작을 비롯해 신학철·홍성담·이종구씨 등의 작품은 20년 남짓한 시간 속에서 이미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가 증발해버린 느낌을 준다.

이 기획전은 한국 현대미술사 연구에서 큼직한 블랙홀로 남아 있는 민중미술을 이제 제대로 보고 말하고 평가하는 일이 필요함을 증거한다. 관람료 어른 7백원, 청소년 3백원. 02-2124-8800.

정재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