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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은 해넘이 e-메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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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부자(父子)가 입을, 마음을 열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올 한해 동안 대학생인 아들이 '운동권'논리에 집착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반면 아들은 아버지가 경제발전만 앞세우는 보수적 의식을 갖고 있다는 불만을 품어왔다. 대통령 탄핵 의결 사태,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던 한해. 부자가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의 벽은 높아만 갔다. 그러던 두 사람이 한해를 마감하며 e-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로 조금씩 다가서기로 다짐하며 사랑과 희망을 그 안에 담았다.

정리=백일현 기자

*** 아들에게

나의 아들 유태야.

아빠가 컴퓨터 잘 모른다고 무시하는 거 같은데 이렇게 e-메일도 쓸 줄 안단다. 네 얼굴 본 지가 꽤 오래된 것 같구나. 올해는 유난히 우리가 말을 안 하고 지낸 것 같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사이만 벌어질 것 같아서 꾹 참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너 역시 그런 눈치일 때가 많았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아빠 품에 안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학교 3학년이 됐구나. 참 세월 빠르지. 아빠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있어 우리 가정은 행복했고, 아빠는 힘을 낼 수 있었단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놓고 너와 대화를 하는 것도 아빠에게는 큰 즐거움이란다.

아빠가 요즘 '영웅시대'라는 TV 드라마 열심히 보고 있는 거 알지. 거기에는 아빠 젊었을 때, 정말 일밖에 모르고 살았을 때의 세상 얘기가 담겨있단다.

아빠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게 너 태어나기 10년 전인 1974년. 월급으로 3만5000원을 받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단다. 아빠는 너희 세대들이 배고프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젊음을 바쳤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올해는 '이러다가 다시 가난한 시절이 오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많이 했단다.

올해는 정말 나라가 어수선했지. 대통령 탄핵에다 수도권 이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등 바람 잘 날이 없었잖아. 사상 최악의 불황이기도 하고. 아들아, 얼마 전에 우리가 국가보안법 얘기 하다가 서로 얼굴만 붉혔었지. 아빠가 경제가 중요한 거라고 얘기하면 너는 딴청만 부렸고. 아빠는 네가 탄핵사태 때 가끔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널 믿는다. 철없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고.

유태야, 새해에는 모든 게 안정돼 우리가 좋은 얘기만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건강해라. 그리고 언제 한번 목욕탕에 같이 가자. 인마, 네 등 밀어본 지 오래 됐다.

아빠가

-아버지 김명국씨.(50)

경기도 화성시에서 보일러 연결용 파이프 제조업체인 전진수지산업사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은 20명.

*** 아버지께

아버지!

메일 잘 받았습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요. 예전에는 추위도 잘 안 타시더니 요즘엔 겨울에 내복 입으시는 거 보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드라마 '영웅시대'얘기하신 거 기억납니다. 그러면서 요즘 세상 걱정하셨죠. 그때 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 한 사람이 우리의 빈곤을 물리친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힘을 합해 일한 결과라고 얘기한 것도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국가보안법 얘기를 하셨으니까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법을 존속시키거나 보완해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 법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악법은 당연히 폐지돼야 합니다. 아버지도 과거 정권들이 그 법으로 마녀사냥을 했다는 거는 인정하시잖아요.

저 촛불시위 했던 거 어떻게 아셨죠.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을 결의했을 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도 광화문에 간 적은 있었지만 요즘은 가지 않고 있습니다. 시위 자체가 의례적이고 일상화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혹시 이리저리 시위하러 다니는 거 아니냐'라고 물으시죠. 저는 늘 아니라고 대답했고요. 그런데 마음 한편에는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 학생운동이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올해 내내 공장 걱정으로 힘드셨다는 거 압니다. 아버지께서는 내색 안 하셨지만 건설 경기가 안 좋으면 우리 파이프 공장 매출이 줄어드는 것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어 하신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너도 이제는 이런 것도 알아야 한다며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이렇게 e-메일으로나마 제 마음을 전하게 돼 뿌듯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라는 구분없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합니다. 아버지, 힘내세요. 새해에는 집안살림도 나라도 다 좋아지겠죠. 참, 목욕탕 언제 가죠?

유태 올림

-아들 김유태씨.(20)

서울대 인문대 2학년이다.안양 신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현재 서울대 '대학신문'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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