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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이분법을 넘어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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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많이 쓰는 단어의 하나가 '디지털'이다. 이는 전자시계나 계산기의 자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료를 수치로 바꾸어 처리하거나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에 대비되는 개념인 '아날로그'는 어떤 자료를 연속적인 값으로 나타내는 방식이다. 시침과 분침이 있는 시계가 그 좋은 예인데, 여기에서 시간은 연속적인 값으로 나타나므로 1초와 2초 사이에도 무한히 많은 서로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 이와 달리 디지털 방식에서는 자료를 연속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1초와 2초 사이에는 다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관계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서도 성립한다. 고전역학에서는 모든 물리량이 연속적인 값을 갖는다. 날아가는 돌의 에너지 값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치가 다 가능하다. 이와 달리 양자역학에서의 에너지는 특정한 값만이 불연속적으로 측정된다. 빛 에너지의 경우 어떤 기본 에너지 값의 정수배에 해당하는 에너지만이 측정된다.

이 기본 에너지에 대응하는 물체를 '양자(子·quantum)'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덩어리' 혹은 '알갱이'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알갱이의 개념을 우리는 이미 화폐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화폐의 기본 단위가 1원이며, 따라서 돈의 액수도 1원의 정수배만이 가능할 뿐 1.3원이나 1.5원은 가능한 돈의 양이 아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모래 알갱이로 이뤄져 있듯 우리의 우주 또한 양자라는 알갱이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출발점이다.

가장 간단한 양자계는 단지 두 개의 상태만이 드러나는, 예를 들면 0 과 1만이 측정되는 물체다. 측정에 의해서는 이 둘만 나타나지만 측정 전의 양자계는 일반적으로 이 둘의 중첩상태에 있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 이전에는 두 가지 대안을 모두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양자계는 두 가능성의 중첩상태에 있다가 측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중의 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는 고전역학에서는 볼 수 없는 양자 세계의 아주 기묘한 고유현상이다.

여기에서 0과 1의 중첩이란 0과 1 사이의 0.5라는 산술적 평균이 아니다. 이는 불교의 중도(中道)라는 개념이 있음(1)도 아니고 없음(0)도 아니며 또한 있음과 없음의 중간(0.5)도 아니지만 있음과 없음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다. 양자계의 중첩상태는 0도 아니고 1도 아니지만 0과 1을 동시에 포함한다. 그래서 이러한 중첩상태에 양자역학적 조작을 가하면 두 상태를 동시에 조작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를 양자병렬처리라고 하는데, 양자컴퓨터는 이를 이용해 고전컴퓨터보다 대단히 효율적인 계산을 수행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0과 1로 이뤄지는 중첩상태의 수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0과 1만이 드러나는 가장 간단한 양자계도 무한한 가능성을 그 안에 내포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첩상태를 잘 활용하면 효율적 계산이라는 의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우리의 사고나 문화도 흑백의 이분법을 넘어서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화할 때 참으로 의미있는 도약이 이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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