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가 음모라고? 거역못할 물결일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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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제목이 말해주듯 정치철학 분야의 이 저술은 '머리 지끈거리는 책'에 속한다. 보통의 독자들이라면 모두 아홉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두 번씩은 읽어야 저자의 사려깊은 성찰이 머리에 들어올지 모른다.(기자도 그랬다). 그러나 이 아카데믹한 철학서는 '해독 불가능한 책'은 분명 아니다.

이 책의 매력은 경제학·정치학·사회학 등 분과학문들이 각자의 짧은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던 세계화 흐름을 전방위 시각에서 통찰하려는 시도 그 자체에서 나온다. 철학이란 본디 분과학문들을 시녀로 거느린 학문인데, 그런 메타(超)학문적 속성을 십분 발휘해보려는 야심찬 전략이다. 저자의 의중을 쉽게 정리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세계화는 찬성이나 반대의 대상을 넘어선 '문명의 전체를 포괄하는 기획'이라고 봐야한다. 과연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화가 그러했듯이 일상 속의 삶의 조건 모두를 뒤바꿔놓고 있지 않은가! 즉 세계화 물결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이제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세계화의 과정은 시장은 물론 국가라고 하는 체제, 그리고 문화·미디어·지식 등 전부를 변화시키고 있다. "

이것을 저자는 세계화의 위력이 갖는 '포괄성과 비(非)가역적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도무지 비켜갈 수 없는 물결'이라는 말이다. 즉 저자는 '세계화=신자유주의적 음모', 혹은 '세계화=미국 헤게모니의 장난'으로 보는 단견(短見)들에 대해, 다소 극적인 표현을 구사하자면 콧방귀를 뀐다.

"세계화 흐름을 현상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성급한 대안을 제시해온 개별사회과학자들은 삶의 지평에 대한 통합적 관점에서 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세계사회의 주요 행위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마치 세계화의 주체가 일단의 경제 이론가들과 금융 자본가들, 그리고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등장했던 신보수주의자의 정치적 계승자로만 국한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33쪽)

따라서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이 현대의 삶 모든 것을 좌우하는 힘이었듯이, 세계화 역시 문명사적 변화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입장 때문에 기본적으로 '전지구적 어젠다'인 세계화의 지형도를 충실히 그리려 하는 저자의 입장이 일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양론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저자의 이런 아슬아슬한 입장은 세계화의 대항명제들인 이슬람문명권의 움직임이나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서 보이는 지역주의나 분리주의 등의 함정을 지적하는 데서도 다시 보인다. 다만 이런 판단들이 정치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성찰의 하나로 음미돼야 하는 이유는 다음 인용문 때문이다.

"세계화가 서구적 이외의 문명권을 지배해나가는 과정으로 진행되리라는 분석 역시 근거없다. 과거 근대성의 경험도 그랬다. 막스 베버가 근대화를 서구적 합리성의 모형이 세계를 지배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했지만, 개별국가들의 근대화 양식은 정형화 안되는 다양한 양상으로 구체화됐지 않은가?" 이런 문제의식은 결국 "세계화가 헌팅턴의 말대로 충돌로 갈 것인지,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이행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에게 주어진 능동적인 세계화의 조절 능력 여부에 달려있다."(2백81쪽)

세계화 현상을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저술로 거의 첫 작업이 되는 저술을 펴낸 임홍빈(49·고려대 철학과)교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과 사회학으로 학위를 받은 중견. 이번 책은 『기술문명과 철학』(문예출판사, 1995)에 이은 후속 저작이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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