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원내대표 두차례나 접점 찾았건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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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 국회의장이 30일 밤 의장실에서 과거사법, 신문관계법 및 새해 예산안의 연내 처리 등 여야 원내대표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있다(左). 이에 따라 국회 예결위 계수조정 소위원회 위원들도 예산안에 대한 막바지 조율작업을 벌였으나 여야 의원들의 반발로 합의안은 31일 새벽까지 진통을 거듭해야 했다.조용철 기자.연합

길고 긴 하루였다. 여야는 30일 지루한 협상 끝에 절반의 타협을 이뤄냈다. 4대 법안 중 과거사 기본법안과 신문법안은 연내에 처리하고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 개정안의 처리는 내년 2월 임시국회로 미루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야의 협상도 물거품이 됐다. 협상 결과를 두고 막판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발해 이날 쟁점 법안들의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기를 든 것은 열린우리당이 이날 의총에서 국가보안법 대체입법안에 대한 여야 합의를 거부한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이날 국회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여야는 원내대표 회담→의원총회→재협상→브리핑→의총… 등의 일정을 31일 새벽까지 빽빽하게 채워갔다. 모든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자 한나라당의원들은 전원이 여당의 단독 처리를 막기위해 본회의장과 법사위 회의실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원래 여당에서 4대법안읜 패키지 처리키로 해놓고 보안법은 미루는등 약속을 깼다"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그래서 본회의장 점거농성에 들어간다"라고 말했다.

◆ "보안법 지키느라 과거사.신문법안 내주나"=밤 11시. 한나라당이 세번째 의총을 열었다. 지도부가 예상치 못한 반발이 나왔다. 다수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보안법을 막느라 나머지를 모두 내주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과거사법안과 신문법안도 보안법.사립학교법과 함께 내년 2월로 처리 시기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영 대표 비서실장은 "여당이 합의를 깼으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그 대가는 우리가 과거사법안과 신문법안을 처리해 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규택 최고위원도 "과거사법안을 통과시키면 엄청난 소용돌이에 처할 것"이라며 "과거사법안의 경우 앞으로 박근혜 대표와 연계될 수 있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 연장안과 조건부로 협상을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덕룡 원내대표는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과 새해 예산안은 자유투표로, 뉴딜 3법인 기금관리기본법과 민간투자법은 권고적 당론을 모아달라"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는 또 과거사법안과 신문법안에 대한 의원들의 반발을 의식해 "두 법안은 처리하되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 대표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박세일.박진.이인기.이군현.이명규 의원 등은 의총장을 박차고 나와 "한나라당의 보안법 개정안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사법안과 신문법안을 통과시켜 줄 이유가 없다"며 흥분했다.

임태희 대변인은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과 새해 예산안을 포함한 모든 법안 처리를 원점에서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에 앞서 오후 8시에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는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 처리를 내년으로 미루고, 과거사법과 신문법을 올해 안에 처리하는 2+2안을 여당 측이 제안해 올 경우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었다.

◆ 세번의 협상 소득없어=이날 여야는 잠시 협상의 기쁨도 맛봤다. 밤 10시5분 국회의장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와 김덕룡 원내대표가 이날 세번째 협상을 끝냈다는 전갈이 의장실에서 흘러나왔다. 문 앞을 지키던 기자들이 결과를 기다렸다. 한나라당 김 대표와 남경필 수석부대표가 먼저 문을 나섰다. 표정이 밝았다. 남 부대표가 큰 소리로 "다 합의됐습니다"라고 했다. 기자들이 합의내용을 묻자 김 대표는 짤막하게 "의장께서 곧 브리핑할 겁니다"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천 대표가 의장실을 나왔다.

◆ 대체입법안 걷어찬 여 의총=이날 여야 원내 리더들이 이끌어 낸 국가보안법 절충안은 여당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천 대표와 김 대표는 김원기 국회의장 주재의 두번째 회담에서 보안법을 폐지하는 대신 '국가안전보장특별법'이란 이름의 대체입법을 만드는 방안을 논의해 의견 접근을 이뤘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의원총회가 '보안법 연내 폐지'라는 기존 당론을 지키기로 해 절충안이 공중에 떠버렸다. 어렵사리 차려진 밥상을 열린우리당 의총이 차버린 모양새가 됐다.

오후 3시30분 열린우리당 긴급 의총장. 천 대표가 ▶당론을 변경해 대체법안으로 바꿀 것인지▶올해 처리를 포기하고 내년으로 넘길 것인지▶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구할 것인지에 대해 의원들의 뜻을 물었다. 이어 벌어진 난상토론.

▶유선호 의원="대체입법안이 국민의 정부에 나왔던 개정안보다도 못한데 어떻게 받아들이나. "

▶임종석 의원="당론을 유지하는 차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지금으로서 우리가 할 일이다. "

▶임종인 의원="한나라당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와 민족에 대한 반역이다. 왜 직권상정은 하지도 않고 이런 것을 논의하느냐. "

▶유인태 의원="이 수준에서 타협을 해야 할지 마음이 몹시 헷갈린다. " (일동 웃음)

발언자 20여명 중 현행 당론 유지를 주장하는 강경론이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한 온건파 의원이 "대체입법안이 부족한 점이 있지만 우리가 양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강경론의 목소리에 묻혔다.

이에 천 대표는 "투표로 결정하려 했는데 의견들이 그러하니 그냥 정리해야겠다. 보안법 당론을 유지하겠다"고 매듭지었다. 한때 대체입법안으로 타협되는 게 아니냐는 기대가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박소영.신용호.전진배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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