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7>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26. 밀감 농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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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여보게, 제주도에 농원을 꾸며보지 않겠나? 귤이나 바나나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해서."

1974년 어느 날 유신화학의 김홍기(金鴻基·작고)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만주 중학교(신징시립공학원) 선배다.

"제주도에다 땅을 사라구요?"

"우리나라에서 열대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곳은 제주도뿐이라네. 재배에 성공만 하면 큰 돈벌이가 될 걸세."

나는 선배의 권유에 솔깃했다.수입품이 아니고는 귤이나 바나나를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제주도에서 밀감이 나긴 했지만 신맛이 너무 강해 먹기에 곤란할 정도였다. 무역상을 하면서 외국의 열대과일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익히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 사업의 성공을 확신했다.

나는 남제주군 남원면 의귀리에 있는 방목지 17만3천평을 매입했다. 해발 1백m가 넘는 고지였다. 그동안 소 몇 마리만 방목할 정도로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 땅을 사서 농원으로 꾸민다고 하자 제주도 사람들은 나를 '돈 버리려고 온 사람'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사전 조사를 다 했었다. 일본에서 유명한 원예 전문가 두 명을 두 차례나 초청해 토질과 기후 조건을 조사했다.

"농원을 꾸미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일본 원예사들의 결론은 고무적이었다.

나는 직원 중 고려대 농과 출신인 주영종 과장을 일본에 수차례 보내 열대과일의 재배기술을 익혀 오도록 했다.

농원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땅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8백m 떨어진 곳에서 동력선을 끌어왔다. 1백20m 깊이의 지하수를 파서 전 농원에 수도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농원 한복판을 가로질러 트럭이 다닐 도로를 만들었고 바둑판처럼 구획정리를 해 소형차가 사방팔방 어디로든 달릴 수 있도록 했다.

농원 이름은 '남원농원'이라 했다. 나는 일본에서 개량한 밀감과 오렌지의 묘목을 수입해 이곳에 심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농림부에서 묘목의 수입을 규제하고 있었다. 묘목 수입상들이 과수보다는 돈벌이가 되는 관상수를 들여오는 데 열을 올렸기 때문에 농림부령으로 막은 것이다.

나는 무역협회 박충훈(朴忠勳·전 총리) 회장을 모시고 최각규 농림부 장관을 찾아갔다. 제주도 출신인 박회장은 고향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줬다. 밀감의 종자 개량을 위해서도 농림부령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박회장을 거들었다.

"장관님, 관상수는 규제를 하더라도 과수는 풀어주셔야 합니다. 관상수는 부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과수는 농민들을 위한 것입니다."

최장관은 우리 주장을 받아들여 농림부령을 해제했다. 나는 일본에서 4만그루의 열대과수 묘목을 수입할 수 있었다. 이를 제주 밀감에 접목했다. 신맛이 훨씬 덜 나는 신품종은 이렇게 탄생했다.

내가 일본에서 묘목을 수입한 뒤 농림부령은 종전으로 돌아갔다. 관상수 수입이 다시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요즘 제주 밀감의 절반 정도는 내가 일본에서 들여온 신품종이 퍼진 것이라고 자부한다. 일본에서 밀감 묘목을 실어나른 오숙명씨도 큰 공헌자다. 재일동포인 그는 서귀포 상효리 중앙농원 주인이었다. 오씨는 농림부령에 묶여 대량 수입이 곤란하던 밀감 묘목을 수시로 일본을 오가며 배나 비행기편으로 날랐다.

농원에 대한 내 애착은 강했다. 86년 5m 높이로 3천평의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바나나를 재배했다.겨울에는 온도를 맞추기 위해 경유로 난방을 했다. 비닐하우스에서 바나나를 재배한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94년 지역농민들을 위해 남원농원을 농협에 감정가로 넘겼다. 농협은 농가에 3천평씩 20년 할부로 분양했다. 제주 농민들은 지금도 그 땅에서 밀감 농사를 잘 짓고 있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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