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6>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 : 25. 첫번째 '딴 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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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는 여성속옷 사업에 45년을 바쳤다. 다른 사업을 하자는 유혹도 많이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섬유산업에서만 한 우물을 팠다.

내가 딴 마음을 먹었던 적은 줄잡아 네번이다. 첫째, 중화학공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 적이 있다. 둘째,밀감농사에 뛰어들었다. 셋째, 목장사업에 손을 댔다. 넷째, 건축회사를 차린 적이 있다.

오늘은 첫번째 하려 했던 사업인 중공업 얘기를 하려고 한다.

1972년 12월 정부는 제철·조선·자동차·기계 등 중화학공업 육성책을 내놓았다. 과열 현상을 빚고 있는 섬유공업을 규제한다는 내용과 함께.

섬유로 기업을 일으킨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섬유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다는 얘기인가."

"중공업에 진출해야 하나."

여차하다간 산업계에서 영원히 낙오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일본 이토추상사의 서울 지점장 기모도를 찾아가 상담을 했다.

"조선산업에 진출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모도 지점장은 일본 스미토모(住友)중기계의 도이 전무와 가내사시(指)조선소의 소가를 만나보라고 했다.

두 전문가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합작을 해도 막대한 투자가 필요해 실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기계공업 분야로 눈을 돌렸다. 하라구치 고베(神戶)시장의 소개로 65년부터 알고 지낸 가와사키(川崎)중공업의 우에다 상담역을 만나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는 가고가와시에 있는 공장까지 나를 안내했다. 마쓰모토(松本)제작소의 마쓰모토 사장과 나가이(永井)철공소의 나가이 사장을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기계공업은 주물이나 단조의 품질 향상 없이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소재산업부터 하는 게 어떨지요. "

이틀 동안 공장 안내를 맡았던 미야게 부장이 들려준 조언이었다.

나는 기계공업 분야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기계공업진흥회 남상철 부회장과 한국차량기계공업 박춘철 사장 등을 만나 국내 실정을 파악했다.

73년 나는 주물공장 설립을 결행했다. 이토추상사의 요네쿠라 자동차 제2부장, 가와구치(川口)금속의 스즈키 사장과 주물공장을 합작으로 세우기로 했다.

합작 비율은 이토추상사 20%, 가와구치 50%, 남영산업 30%였다. 회사 이름은 남영금속공업㈜으로 정했다.

때는 마침 창원공업단지를 한창 조성하던 참이었다. 나는 그 중 2만여평을 공장부지로 매입했다. 창원공단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1년 만에 공장을 완공했다. 안경모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이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공장가동률이 50% 밑으로 곤두박질했다. 제품의 절반은 일본에 수출하고, 나머지 절반은 기아자동차에 납품하기로 했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공장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기계공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합작사인 이토추상사와 가와구치 관계자들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온갖 고생을 다해 회사가 겨우 자리를 잡으려는 시점에서 빠지겠다고 하니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들과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자금이 풍부했지만 나는 은행 빚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주거래 은행인 한일은행에서 대출받은 공장 건설자금 이자가 큰 부담이었다.

"투자비용 5억원을 고스란히 날려야 하나."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만 결단을 내렸다.

"은행 부채만이라도 떠안아 주십시오."

나는 기아자동차에 지분을 넘기고 몸만 빠져나왔다. 이토추상사와 가와구치는 지분을 그대로 유지했고 나만 빈손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기계공업보다 섬유공업이 체질에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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