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끝> "경기 진 뒤에도 열띤 응원에 가슴 뭉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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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전세계를 매혹했다.'월드컵 무승(無勝)'에서 '4강 진출'로 단숨에 뛰어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붉은 바다'로 전국을 휘감은 수백만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대~한민국'은 지구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한데 엉겨 가슴을 치며 기뻐했던 한국민들을, 수백만명이 지나간 자리에 쓰레기 하나 남지 않았던 응원현장을, 서울 주재 외신기자와 외교관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월드컵 신화를 일궈낸 한국민의 저력과 앞으로의 과제를 이들의 눈을 통해 살펴본다.

▶라운즈: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흥미진진하다'는 수사가 부족할 정도로 정말 훌륭하고 인상깊은 대회였습니다. 축구 변방국으로 알려졌던 한국·일본·미국·터키 등이 조별 리그를 모두 통과하고 아프리카의 세네갈이 돌풍을 일으킨 데 비해 일부 축구 강국은 탈락했습니다. 특히 한국과 터키는 각각 아시아 국가와 이슬람 국가를 대표해 처음으로 4강까지 올라가는 선전을 했어요. 이번 월드컵을 상징하는 말은 '흥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시마:나는 이번 월드컵이 '아시아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것, 특히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함께 일궈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 한·일 두 나라 대표팀이 공동으로 결승토너먼트까지 진출한 것은 아시아의 저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커크:이번 월드컵은 '한국의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사회안정을 이룩한 한국민들의 축제였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아시아 돌풍을 일으킨 한국과 일본팀의 선전이 돋보였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훌륭한 시설을 갖추게 된 두 나라는 축구강국으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라운즈:특히 한국에는 히딩크라는 명장과 노력하는 선수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들의 강력한 성원이 있었습니다. 지칠줄 모르고 그라운드를 누비던 한국 선수들의 체력에는 감탄했습니다. 한국팀이야말로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팀이 아니었을까요.

▶커크:가장 재미있는 경기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이었습니다. 연장전 끝에 안정환의 골든골로 승부가 갈린 이 게임은 한국 민족의 강인함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오시마:월드컵이 시작하기 전에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일본팀이 한국팀보다 강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에 한수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였죠.하지만 나는 오히려 한국팀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고, 내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일본이 '조직력'에 주력했다면, 한국팀은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에 중점을 두었다고 봅니다. 대표팀은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개개인의 능력을 하나의 힘으로 결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팀의 선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커크:당초 한국은 공동개최국인 일본보다 여러 면에서 환경이 열악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은 월드컵 결승전까지 그 열기를 끌고 갔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한국팀이 선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라운즈:한국팀의 선전 못지않게 세계의 주목을 끈 것은 거리 응원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번에 단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한국인들은 함께 모이는 것을, 그리고 응원 자체를 즐겼기 때문에 수백만명이 거리에 모여 하나가 돼 응원을 하고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애국심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비 더 레즈(Be the Reds)'문구가 새겨진 티셔츠까지 사서 선물했지요. 모두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엔 이처럼 뜨거운 열기가 없었습니다.

▶커크:직접 경기장을 찾은 포르투갈전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이 있을 때마다 거리 응원전이 펼쳐진 광화문과 시청앞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속속 들어서는 시민들과 함께 손뼉을 치고 춤을 췄습니다. 터질 듯한 열기 속에서도 경찰의 안전선은 한차례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전체적으로 평화로웠습니다. 평소 수줍음 많던 한국민들이 모르는 옆 사람과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요. 특히 독일과 터키에 한국이 패한 뒤에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오시마:수백만명이 거리에서 하나의 동작을 하고 하나의 구호를 외치는 한국의 거리 응원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됐습니다. 일본인들은 경기장 입장권을 구하지 못했다면 집에서 편하게 TV를 봤을 겁니다.하지만 한국인들은 힘들어도 거리에서 함께 응원하는 걸 원했죠.이게 바로 국민성의 차이가 아닐까요.

▶라운즈:한·미전이 있던 날, 거리응원이 반미시위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불미스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독일과 경기를 치르던 날, 광화문으로 나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패배에 마음은 아팠겠지만 모두가 응원을 멈추지 않았고, 국가를 부르며 선수들을 격려했어요. 가슴이 뭉클했지요. 저는 가족들에게도 e-메일을 보내 이런 감동적인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오시마:한국과 일본도 이번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상대국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상대국의 경기 결과에 관심을 갖고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일본이 16강전에서 패하고한국이 8강에 진출했을 때 일본 국민들은 진심으로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했습니다.누가 지시한 것도, 부추긴 것도 아닌데 평범한 일본 시민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응원했습니다. 외교관인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대목입니다. 한국인들도 이런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진한 우정을 느꼈으리라 기대합니다. 한·일 양국 국민이 서로에게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 이게 이번 월드컵이 가져다준 의미있는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라운즈:이번 월드컵은 분명 한국의 이미지를 한 단계 격상시켰어요. 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입니다.

▶커크:월드컵의 열기가 한국의 정치·경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은 이미 정치·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의 목적에 맞게 월드컵을 이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월드컵 정신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오시마:월드컵의 열기를 다른 방면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번에 한국인들이 보여준 에너지는 원래 한국이 갖고 있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도 아무런 혼란이 없었고, 한국팀이 패한 뒤에도 불미스런 사고 하나 없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점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안정되고 성숙했다는 의미니까요.

▶라운즈:승리한 나라들은 벅찬 환희를 맛봤겠지만, 탈락한 나라들은 좌절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래도 이번 대회는 모두에게 행복한 월드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터키가 경기를 마친 뒤 그라운드에서 얼싸안는 장면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 않는 화합의 월드컵이 무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어요.

▶커크:앞으로 경기장 활용이 흥미롭습니다. 이 훌륭한 경기장들이 K-리그 활성화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국제대회나 국가간 경기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도 있겠지요. 국제축구연맹(FIFA)이 책정한 월드컵 경기장 입장권 가격이 비싼 것은 문제였습니다.'함께 하는 월드컵'이라는 주제와 맞지 않기 때문이지요. 한국전에만 열광한 한국인들의 태도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한국의 월드컵 열기가 한국 프로축구 활성화로 이어지기 바랍니다.

진행=박소영 기자·정리=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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