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1>고양이를 란제리로 (20)제조업체 첫 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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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제조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신기한 편직기를 본 김에 덜컥 사겠다고 결정은 했으나 막막했다.

일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공장 지을 땅부터 찾아나섰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던 감자밭 3천여평을 싼값에 매입했다. 여기에 2층짜리 공장 건물을 지었다. 이때 세운 회사가 비비안의 전신인 '남영염직주식회사'다. 1957년 6월 14일이다.

"독일에 신기한 기계를 사러 가는데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경남모직(慶南毛織) 김택수(전 국회의원) 전무, 남양산업(南陽産業) 홍사장, 상정상사(相正商事) 김정중(金正中)사장을 모시고 독일로 건너갔다. 이분들은 나에게 많은 조언을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작고했다.

독일 마이어사에서 '트리코트' 편직기 17대를 샀다. 한대에 2만달러 정도 했다. 기계값의 20%인 6만8천달러는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미국 원조자금으로 충당했다. 당시 한국은행은 미국 정부에서 받은 원조자금을 관리했다. 미 대외활동본부(FOA)와 미 경제협조처(ECA)의 원조자금을 빌려주고 연차적으로 갚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이듬해 나일론 원단을 생산하기 시작했다.직원은 50여명 뽑았다. 독일 기술자가 와서 트리코트 편직기 사용법을 교육했다. 이렇게 해서 남영염직 공장은 정상으로 가동됐다.

따지고 보면 직원 50여명과 트리코트 17대가 지금 비비안의 첫걸음이 된 것이다. 올해로 창립 45주년을 맞은 비비안은 백발로 변한 내 모습만큼이나 많이 달라졌다. 직원은 1천6백명으로 늘었고, 나일론 원단을 생산하던 영세기업이 국내 여성 속옷시장 1위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새로 나온 나일론 원단이 있다는데, 어떻게 생긴 겁니까?"

트리코트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기계였다. 새로 나온 나일론 원단을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직물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금이야 나일론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옷감이지만 당시에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만큼 질기고 가벼운 옷감이 없었다. 서민들은 나일론 원단으로 옷을 맞춰 입는 게 꿈이었다.

가정집에서 재봉틀을 돌려 옷을 해 입거나 양품점이나 양장점에서 맞춰 입었다. 나일론 원단으로 만든 양말도 인기절정이었다. 구멍이 쉽게 안나는 양말은 신기하게 보였다. 땀이 잘 통하지 않아 무좀이 생기기 쉽다는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나일론 원단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17대의 트리코트는 쉴 틈이 없었다. 24시간 내내 원단을 짜냈다. 새벽마다 공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인들에 의해 원단은 전국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수원에 공장이 있는 선경직물의 최종건(작고)사장도 우리 공장에 나일론 원단을 보내 가공처리를 부탁하곤 했다.

"거 정말 좋은 기계로군! 우리도 빨리 사와야겠는 걸."

최종건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겨울이 되자 나일론 원사가 잘 팔리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돈도 모자랐다. 빚을 얻어써야 할 판이었다. 친한 선배에게 돈을 빌렸다가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곤경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견사를 취급하는 대륙상사(大陸商社)의 최창근(崔昌根·현재 영락교회 원로장로) 사장이 찾아왔다.

"트리코트 기계를 그냥 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겨울철이니까 털이 북실북실 일어나는 천을 짜보면 어떨까요?"

"어떻게 만들지요?"

"나일론 원단을 짠 뒤 솔로 긁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최씨의 아이디어는 이른바 '기모지(起毛地)'를 만드는 것이었다. '털이 일어나는 천', 기모지가 나의 재기를 도왔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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