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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치우천왕(蚩尤天王) : 외래·토착문화의 융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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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붉은 악마를 통해 우리는 외래 문화와 토착 문화의 코드가 결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붉은 악마는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 축구팀이 4강 진출로 돌풍을 일으켰던 1983년 멕시코대회 때 얻은 별명이다. 붉은 악마의 본래 이미지대로 하자면 타로(카드)에 나오는 그 모습처럼 산양의 머리에 박쥐의 날개, 그리고 비늘 돋친 몸통을 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꼬리가 달려 있다. 악마는 아무리 변신해도 그 꼬리 때문에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파가니니나 니진스키 같은 전설적인 예술가들이 나타나면 으레 무대 뒤에서 꼬리를 봤다는 사람들이 생기곤 한다.

서양 악마와 중국 신화 뒤섞여

그러나 그것이 구미 문화권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면 도깨비나 귀신 같은 모습과 맞물리게 된다. 대부분의 우리 문화 코드처럼 양옥 곁에는 한옥이 있고 양복 옆에는 한복이 있듯이 외래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이 병행하는 이중 코드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때로는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어느 한쪽에 흡수돼 소멸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붉은 악마의 경우에서는 그것이 서로 병존 융합하는 특별한 퓨전 코드로 발전한다.

99년 브라질과의 경기 때부터 붉은 악마의 유럽 문화 코드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토착문화 코드가 첨가된 것이 그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치우천왕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쇠머리에 사람 몸을 한 괴물이다. 그리고 우주의 최고 지배자인 황제(黃帝)와 싸워 승승장구했던 힘센 반역아다. 두말 할 것 없이 그러한 신화는 중심에 중국(中國)이 있고 동서남북의 그 주변에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의 오랑캐들이 있다는 화이(華夷)적 문화 코드의 산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는 글자에도 나타나 있듯이 가운데와 토(土)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돼 있고 치우는 변방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로 그가 도우려 한 적제(赤帝·炎帝)의 경우처럼 남방과 불을 나타내는 붉은색이다. 이같은 코드 해석을 통해 보면 치우는 자연스럽게 붉은 악마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더구나 치우를 주변 코드의 시각에서 보면 동이민족(東夷民族)의 영웅으로 떠받칠 수 있다. 실제로 붉은 악마가 내세우는 치우천왕은 중국 측 시각이 아니라 한족(漢族)과 싸워 이긴 배달나라의 제14대 자우지 환웅이라는 『환단고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치우를 한민족의 영웅설화로 코드화한다고 해도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서양의 악마보다 더 낯설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 붉은 악마의 캐릭터를 보면 옛날 한국의 기왓장에서 보던 바로 그 도깨비요,귀면이라는 느낌이 온다. 이를테면 붉은 악마는 서구 이미지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중국의 신화, 한민족의 설화, 그리고 민속적인 코드가 서로 융합돼 있다. 음식으로 말하면 서로 다른 재료를 보쌈으로 해놓은 잘 발효된 김치와도 같다, 아니면 다섯 색깔의 나물로 된 오훈채의 맛과도 같다.

말도 마찬가지다. 한국말은 외래어를 보쌈처럼 싼다. 동해(東海)는 한자말이지만 그대로 놔두지 않고 바다라는 순수한 우리말을 겹쳐 '동해바다'라고 한다. 노래 가사처럼 고래 잡으러 "동해로 가자"라고 하지 않고 "동해바다로 가자"라고 해야 자연스럽고 실감도 난다. 초가집이 그렇고, 역전 앞이 그렇고, 처갓집이 그렇다. 아무리 표준 맞춤법에서는 틀린 어법이라고 해도 한국인이면 한자만이 아니라 일본말·영어까지 그렇게 말한다. 일본말에서 들어온 모찌 떡이 그렇고 영어에서 온 깡통(깡은 영어의 캔으로 통을 의미한다)이 그렇다. 야구중계에서도 이따금 라인 선상이라는 겹친 말을 들을 수 있다.

하나로 어울려 엄청난 에너지

붉은 악마는 그러한 겹친 말처럼 서양과 중국과 한국의 각기 다른 문화를 한데 융합시킨 퓨전 코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 월드컵 때에는 호랑이까지 넣은 새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것은 악마이자 우두인신의 괴물이고 문무를 겸비한 영웅 장사고 도깨비며 호랑이다.

마치 축구가 서양에서 들어온 문화이면서도 어느새 우리 씨름이나 제기차기처럼 한국인의 몸에 밴 스포츠와 축제가 된 것과 같다. 붉은 악마도 치우천왕도 다 같이 서먹하고 낯선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로 어울릴 때 핵 융합 같은 엄청난 에너지가 생긴다. 단일 신화 코드에 속하는 일본 축구 서포터스의 상징물인 야타가라스(三足烏)와는 대조적이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도 한국의 축구를 멀티 사커·퓨전 사커라고 불렀으며 거기에서 4강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어령 고문의 홈페이지(www.oyoung.net)에서 시리즈와 관련된 글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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