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4>제102화 고쟁이를 란제리로:13.다시 조국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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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장사가 이런 식으로 잘 되면 금세 집 한채 장만하겠는 걸?"

일본인 피란민을 상대로 시작한 과자장사는 물건이 달릴 정도로 잘 됐다. 동업자 장씨 아저씨는 신바람이 났다. 늘 싱글벙글하고 다녔다. 요즘 생각하면 틈새시장을 잘 개척해 대박을 터트렸던 셈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폭리를 취하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나마가시(생과자)를 떼어다 파는 일본 여자들도 이문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값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를 수가 없었다.

장사가 잘 되자 밤 새워 일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정신력으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한편으론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만주 땅에 머물고 있던 한국인들이 너도나도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냥 눌러 앉을까?"

과자장사가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꿈틀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만주 땅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며 조국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따르기로 했다. 나도 조국 땅이 그립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 과자장사 그만두고 조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장씨는 펄쩍 뛰었다.

"안돼. 이렇게 장사가 잘 되는데 그만두다니."

장씨는 내 소매를 붙잡으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내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고 더이상 말리지는 못했다.

"자네 몫으로 2만엔을 주지."

그는 정직했다. 그동안 번 돈을 나와 똑같이 나누었다.1천엔으로 사업을 시작해 두달만에 2만엔을 챙겼으니 스무배 장사를 한 셈이었다.

내가 신징(新京)을 떠난 것은 1945년 11월 17일이다. 신징에서 안둥(安東)으로 가는 열차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인 정일권(丁一權)·강문봉(姜文奉) 장군이 동승했다.

정씨는 나중에 박정희 정권 때 국무총리에 올랐고, 강씨는 정씨와 더불어 국방경비대를 조직한 창군 멤버로 6·25 때 군단장을 지낸 인물이다.

두 사람은 만주에 머물고 있다가 귀국하는 한국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기 위해 보안대를 조직해 동승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 열차 안에서 강도짓을 일삼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신징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열차에 오른 나는 보안대 덕분에 2만엔을 품속에 고이 간직한 채 안둥까지 갈 수 있었다. 신징에서 선양(瀋陽)까지 다섯 시간, 다시 선양에서 안둥까지 열여덟 시간 걸렸으니 초조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열차 안에서 강도를 만나 돈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가시지 않았다. 안둥역에 빨리 도착해 압록강을 건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의 불안은 기우였다. 보안대의 엄호를 받으며 우리는 아무런 탈없이 열차 '여행'을 마쳤다. 지금도 나는 우리의 귀국을 도와준 보안대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안둥역에 내렸을 때 철도 복선공사 현장감독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2년 전 내가 건설한 철도를 이용해 귀국하게 됐으니 감회가 깊었다.

안둥과 신의주 사이에 있는 압록강에는 철교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이렇게 해서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어머니도 중국 땅에 머물고 있던 때가 불안했던 모양이다.

만주에 있을 때 어머니가 조국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과자장사에 재미를 느껴 만주에 그냥 눌러 앉았다면…. 지금쯤 중국 땅에서 조선족이 되어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시기를 놓쳐 미처 귀국하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지금도 중국 땅에 남아 살고 있지 않은가.

당시 중국인 가정에 아이를 맡겨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던 일본인들도 많았다. 중국에서 자란 일본 아이들이 나중에 모국을 방문해 가족찾기 운동을 벌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만주 시절을 떠올린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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