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2>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 11.학업을 위해 만주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내 수첩의 기록은 1960년부터다.

그 이전의 이야기는 내 기억의 갈피 속에 있다. 보따리 장사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려면 아무래도 수첩을 접어두고 기억부터 풀어헤쳐야 할 것 같다.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英陽)이다. 할아버지는 영양군 영양면장을 지내셨다고 한다. 나는 머슴까지 둔 중농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3개월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직접 농사를 지으셨는데, 가을 추수 때는 벼 한 가마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멜 정도로 여장부다운 데가 있었다.

영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 청운동에 있는 경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쳤는데 그만 불합격하고 말았다.

내가 시험을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에 살고 있던 형님(南相默)까지 오셨는데 실망만 안겨드렸다.원래 나는 사형제 중 막내였으나, 형님 두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나보다 여덟 살이나 위인 형님밖에 없었다.

"서울에선 떨어졌지만 만주에 가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을 것이다."

형님은 나를 위로했다.

어머니와 나는 형님을 따라 만주로 갔다. 형님은 지금의 창춘(長春)인 신징(新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신징에 거처를 마련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신징에서 유명했던 시립중학교는 학생의 90%가 일본인이었다. 나머지 10%가 중국인과 한국인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이 그 학교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신징시립공학원 토목과를 택했다. 이 학교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각각 40%였고, 나머지 20%가 일본인 학생이었다.

43년 신징시립공학원을 졸업한 바로 그해에 우리 집안의 가장인 형님이 25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옛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두 형님까지 모두 폐결핵으로 돌아가셨는데, 하나 남은 형님마저 그 못된 병마에 희생된 것이었다.

"이젠 네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다."

형님의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등에 무거운 짐을 진 기분이었다. 18세의 나이로 졸지에 가장이 된 나는 취직자리부터 알아보지 않으면 안됐다. 그때 마침 일본은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선양(瀋陽)에서 안둥(安東)까지 철도를 복선으로 하는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신의주(新義州)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안둥이니까 선양과의 거리는 꽤 먼 편이다.

그 전에는 철로가 한 선밖에 없었으나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이 군수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철로를 하나 더 놓게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어머어마한 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만큼 건설기술자들도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의 기술자들은 대부분 전선으로 끌려간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공사를 맡은 일본 다카오카(高岡)건설사에서는 토목을 전공한 졸업생들을 찾았다. 나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자네, 공사 현장 감독을 맡을 수 있겠나?"

"네, 자신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인사담당자의 면접을 통과한 나는 졸업하자마자 다카오카 건설사의 철도 복선공사 현장감독으로 채용됐다.

그 자리는 일본인도 현장 경력이 5년을 넘어야 오를 수 있는 '감투'였다. 하지만 전쟁 통에 기술자가 태부족했던 상황이고, 나는 전공(토목)도 좋아 그런 행운을 쉽게 안을 수 있었다.

당시 내 월급은 수당을 포함해 1백엔을 웃돌았다.그 무렵 중학교 교사 초봉이 한달에 20엔 정도였으니 어린 나이에 엄청난 고소득자 대열에 올랐던 것이다.내 월급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7백만원쯤 되는 것 같다. 매월 돈이 금방금방 불어나니 어린 마음에 큰 부자가 된 듯했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