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판매기간 너무 짧고 시장성 떨어져 빛바랜 금융상품'특허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9면

지난해 12월 증권·투신사 등 금융권이 도입한 '배타적 상품사용권' 제도가 표류하고 있다.

금융권에 만연해 있던 '베끼기'관행을 없애고 창의적인 상품개발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으나 있으나마나 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제도는 쉽게 말하면 "일정 기간 다른 동종 업체들이 특정 업체가 개발한 상품을 사용하는 걸 금지한다"는 일종의 특허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상품보호 기간이 턱없이 짧은 데다 지나치게 독창성만을 강조해 시장성이 떨어지다보니 공들여 배타적 상품권을 따놓고도 정작 상품을 팔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 금융권역별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마당에 각 협회에서 심사권을 고수하다 보니 구조적 모순도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투신협회에서 배타적 상품권을 인정한 투신상품을 은행에서는 버젓이 팔아도 별 문제가 안되게끔 돼 있는 것이다.

◇어떤 상품들이 배타적 상품권 따냈나=현재까지 은행·증권·투신·보험사 중 배타적 상품권이 인정된 것은 총 12건.

<표 참조>

증권사가 6건을 따냈고 ▶투신사 4건▶은행 1건▶보험사 1건이다. 그러나 증권·투신사의 10개 상품 중 배타적 사용권을 얻은 후 실제 시판하거나 설정한 것은 한투운용의 '부자아빠펀드'와 미래에셋투신운용의 '시스템캡펀드'의 단 두 개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배타적 상품권이 인정되는 기간 중 상품화에 실패했거나 미뤄졌다. 고객을 위한 다양한 상품 개발이라는 당초의 목표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A증권사 관계자는 "배타적 상품권을 따낸 후 상품화하려 했지만 너무 시장성이 떨어져 출시를 포기했다"며 "일선에서는 배타적 상품권을 일컬어 '작품성은 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게 마련인 아카데미 작품상'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독창성 부문에 절대적인 점수를 주다 보니 '상품=돈'을 이끌어내야 하는 일선 금융기관들이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두달 가량 증권업협회와 투신협회에 접수된 배타적 사용권 심의신청 건수는 거의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먼저 보호기간이 너무 짧다는 지적이다. 기왕 배타적 사용권을 주기로 했으면 시스템개발 기간이나 투자비용 등을 보상할 정도의 보호기간을 줘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배타적 사용권이 인정된 것 중 절반은 1개월짜리이며 가장 긴 것이 3개월짜리다.

한투운용 권오경 금융상품연구소장은 "5개월 동안 별도 팀을 운용하며 만든 상품에 대해 1개월밖에 독점권을 주지 않으니 마케팅 준비 기간 등을 빼면 배타적 사용권을 누릴 만한 시간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보호기간이 워낙 짧다 보니 심의위원회에서 상품 구조가 노출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도 "6개월 이상 인력·시간을 투자해 개발한 상품에 대해 2개월간의 보호기간이 끝나자마자 다른 은행·캐피탈사가 이를 거의 베끼다시피 한 유사 상품을 내놓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투신협회 관계자는 "배타적 사용권을 길게 줄 경우 다른 회사들이 선의의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문제는 각 금융권이 따로 배타적 사용권을 심의하다보니 권역별로 혼란이 야기된다는 점이다. 현재 은행들이 투신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데다 7월부터는 증권사들도 어느 권역의 상품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복합파생상품을 시판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 협회에서 결정한 배타적 사용권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바꿔야 하나=증권업협회 김형태 연구위원은 "하루빨리 은행·증권·투신·보험권을 하나로 묶어 총괄심의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며 "그래야 금융권역간 혼란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래에셋투신 관계자는 "무조건 독창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선에서 배타적 상품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총괄심의위원회를 구성한 뒤 현 심사 기준을 조정하고 보호 기간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금융지도팀 관계자는 "제도 도입 초기인 탓에 여러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며 "보호기간을 늘리는 문제는 긍정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현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