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시대 'CF같은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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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신용카드 광고들. 미모의 연예인이 맑은 웃음을 흘리며 지갑을 여세요, 그리고 쓰세요, 삶을 업그레이드 하고 싶다고요, 머뭇거리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미친 듯 일해 더 미친 듯 쓰는거예요~부~자 되세요 하는 데 3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도처에 넘쳐나는 이 '장밋빛 인생' 찬양의 행진 맨 앞자리에 광고가 서있다. 그러나 광고를 소재로 한 소설 『장밋빛 인생』은 이 찬양의 행진에 쉼표를 찍고 물음표를 던진다.

뛰어난 광고기획자인 주인공은 회의와 고민에 휩싸인다. 사표를 낼까 말까, 번민한다. 30초만이 의미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인생이 30초에 끝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2백13쪽)

그 계기는 그와 불륜의 사랑을 나눴던 여자의 자살이었다. 그는 광고(일)에 중독됐었다. 중독은 더 센 강도의 자극을 요구했다. 그 요구는 몸과 마음에 탈을 낼 수밖에 없다. 메시지를 보낼 줄만 알았지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랑이 일과 소비의 틀을 깨고 넘어서려 하는 순간 머뭇거렸다.

진정 존재하는 건 아픈 사랑인데 그에겐 아픔의 이미지만 가득했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포즈만 취하고 있었다.

그는 불특정 다수를 설득해 지갑을 열게 하는 데는 능했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소통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내와는 도대체 대화가 불가능하다. 아내는 헤드폰을 끼고 TV를 보며 소통이 불가능한 불구적 부부 관계에 대해 시위한다. 하지만 소설은 주인공에게만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조작된 상징, 가공의 이미지에 빠져 뼈마디에 맺힌 아픔과 흐르는 눈물에 새겨진 멍자국에 무감각한 사랑 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

인기 요리 강습 프로그램 진행자인 아내는 대중을 상대로 "요리는 허기만을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불꽃을 일렁이게 하는 것"이라며 요리에 이미지를 덧씌우지만 정작 자신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남편과는 식사조차 한 번 할 수 없다. 재즈댄스 강사는 수강생 몰래 헬스클럽에 다니며 몸매를 다듬으면서 태연자약히 "자신이 움직이는 광고판이 돼야지. 조금만 참고 뛰면,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 하는 환상을 줄 수 있어야 해요"(20쪽)라고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표상하기 위해 '이마골로기'란 용어를 만든 사람이 밀란 쿤데라였던가.

그가 머리를 쥐어짜내 만든,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의 합성어인 그 단어. 자본주의는 총칼로 위협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과 소비의 속도전에 뛰어들게 할 뿐이라는 뜻이다. 그 이면엔 진실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야유와 조롱이 놓여 있다.

그러니까 광고 제작 과정과 자살한 애인에 관한 기억을 두 축으로 전개되는 『장밋빛 인생』은 이마골로기 사회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올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이 소설이나 2000년 당선작인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모두 조작된 이미지에 중독된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 소설의 경향을 짚어내는 데 하나의 가늠자 역할을 했던 '오늘의 작가상' 당선작이 최근 들어 일관된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소설의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우발적 사건으로 처리한 끝맺음에선 작가가 주제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장밋빛 인생』은 장점이 더 많은 소설이다.

광고라는 전문 영역에 대한 꼼꼼한 취재, 현실과 기억이란 두 부분을 효과적으로 배치한 소설 구성, 섬세한 문체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높여준다. 정미경(42·사진)씨는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됐으며, 2001년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을 발표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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