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동그라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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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대흠(1967~ ), 「동그라미」 전문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 오랜 시간의 비바람을 견뎌낸 말의 유적을 보는 듯 하다. 오래된 말은 아직도 입, 입술, 혀, 구멍, 눈 따위 몸에 생긴 부드럽고 둥근 것들을 닮아 있다. 표준어, 외래어, 신조어, 텔레비전, 신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 얼마나 많은 새로운 말의 풍파가 그 말의 유적에 부딪쳐 왔을까. 그래도 말의 유적은 오히려 그 비바람에 닳아 오래된 석불처럼 둥글둥글하고 부드럽다.

이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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