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잡기'4골… 명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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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6월 4일 오후 7시 50분. 사이타마 월드컵 경기장은 안개가 덮여 있었다. 마치 격전 90분이 남긴 포연과 같았다. 후회없이 싸운 두팀의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유니폼을 벗어 교환하며 서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과 벨기에가 펼친 후반 45분은 일본 국민들과 전 세계 축구팬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명승부가 됐다. 술래잡기하듯 주고받은 네 골은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구긴 아시아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개최국 첫 경기 무패(12승4무)의 전통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 남은 러시아·튀니전을 향한 추진력을 얻었다는 점이 큰 소득이었다.

첫 골은 후반 12분 벨기에의 주포 마르크 빌모츠가 빚어낸 '예술품'이었다. 일본 문전에서 혼전 중 높이 떠오른 볼을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그림 같은 오버헤드슛으로 일본 골그물을 진동시켰다.

불과 2분 뒤 일본의 동점골이 터졌다. 하프라인 왼쪽에서 넘어온 볼을 향해 스즈키 다카유키가 쇄도했다. 수비 세 명과의 경합에서 몸을 빼낸 스즈키는 넘어지면서 볼에 발을 댔다. 볼은 달려나온 골키퍼를 스치듯 골그물로 굴러들었다. 찰나의 침묵. 그리고 사이타마 경기장은 푸른 물결로 뒤덮였다.

"오~ 닛폰"합창은 후반 22분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미드필드 왼쪽에서 볼을 잡은 이나모토 준이치가 수비 한 명을 제치고 페널티지역 왼쪽으로 치고들어가면서 왼발 슛했다. 볼은 오른쪽 골그물에 철썩 달라붙었다가 데구르르 떨어졌다.

승리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일본에 불길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비의 핵인 모리오카 류조가 29분 다리를 절룩이며 벤치로 물러난 것이다. 며칠 전 훈련 도중 코뼈가 내려앉았던 미야모토 쓰네야스가 얼굴에 보조대를 댄 채 빈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모리오카의 빈자리는 컸다. 1분 뒤인 후반 30분 벨기에의 하이덴이 미드필드에서 넘어온 볼을 따라 2선에서 쇄도해온 후 골키퍼를 살짝 넘기는 슛을 성공시켰다. 이후 일본은 기어이 승부를 보겠다는 듯 더 공격적으로 나왔다. 경기가 끝났지만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체격과 힘의 열세를 딛고 선전한 일본 선수들은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개선장군처럼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사이타마=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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