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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들 수시로 경기 제외, 끊임없이 ‘공격 본능’ 자극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우루과이의 골잡이 디에고 포를란(왼쪽)이 3일(한국시간) 가나와의 8강전에서 득점한 뒤 기뻐하고 있다. 오른쪽은 루이스 수아레스. [요하네스버그 AP=연합뉴스]

축구는 결국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스포츠다.

그런 이유로 각 팀에는 맹수처럼 적진을 향해 돌진해 먹이를 잡는 사냥꾼이 필요하다. 그들은 ‘킬러(Killer)’라 불린다.

킬러는 ‘죽이는 사람’ ‘살인마’ ‘도살자’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지만 축구에서는 최후의 결정적인 한 방으로 승리의 마침표를 찍는 해결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축구는 22명이 죽도록 눈물 나게 싸우지만 결국 킬러의 발끝에서 결정되는 게임이다.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킬러들의 발끝에 울고 웃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완벽하게 경기를 지배하던 한국은 루이스 수아레스(23·아약스)의 오른발 감아차기 골 한 방에 무릎을 꿇었다. 마찬가지로 16강전에서 맞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혈투’는 스페인의 다비드 비야(29·발렌시아)의 한 골에 희비가 갈렸다. 독일 국가대표 킬러 미로슬라프 클로제(바이에른 뮌헨)는 ‘월드컵 사나이’답게 남아공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무너뜨리는 골을 뽑았다.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독일)에서 3골(25경기)에 그쳤던 클로제는 또 한번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수아레스·클로제·비야의 드라마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서 볼을 찰라치면 가장 축구 잘하는 아이들이 ‘차범근’ ‘황선홍’의 타이틀을 가져가곤 했다. 이들은 항상 최전방에서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를 맡아 팀을 이끌었다. 가장 빠르고, 기술 좋고, 정확한 슛을 구사하는 이들이 공격수를 맡았다. 킬러는 이 같은 우열의 법칙에 따라 가장 강한 자들이 차지하는 영예이자 훈장이었다. 유로 2000(유럽축구선수권)에서 6골로 득점왕에 올랐던 전 네덜란드 대표 파트리크 클뤼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네덜란드 명문 아약스에서 공격수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길러진 킬러다. 네덜란드는 공격수와 중앙 수비수·골키퍼 등 세 포지션의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자질을 판단한 후 한 포지션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육성한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아르헨티나의 킬러 가브리엘 바티스투타(A매치 78경기 56골·경기당 0.71골)의 결정력은 대단했다. 그가 공을 잡으면 해설자가 그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골을 성공시킨다고 해서 ‘바티∼골’이라고 불렸다.

94 미국 월드컵 우승 주역인 브라질의 호마리우는 A매치 58경기 44골(경기당 0.75골)을 뽑았다. 그가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에서 활약할 시절 감독이었던 히딩크는 자주 그를 일부러 경기에 제외시켜 킬러 본능을 자극했다. 히딩크 감독은 “잔뜩 약이 오른 호마리우를 스테아우아 부큐레슈티(루마니아)전에 투입했더니 15분 만에 3골을 터트렸다. 난 자극하면 곧바로 반응하는 선수들을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잉글랜드 킬러 앨런 시어러(63경기 30골·0.48골)와 네덜란드의 데니스 베르캄프(79경기 37골·0.47골) 등은 A매치 평균 경기당 0.4골 이상을 뿜어냈다. 축구에서는 대체로 10경기에서 4골을 뽑는 결정력을 지녀야 킬러라고 부른다. 한국 축구를 통틀어 이 기준을 충족시키는 선수로는 차범근(121경기 55골·0.45골), 황선홍(103경기 50골·0.49골), 김도훈(71경기 30골·0.42골) 등이 있다.

빗장수비로 불리는 ‘카테나치오’를 고안해낸 이탈리아가 통산 4차례 월드컵을 우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결정을 해줘야 할 때 결정을 해줄 줄 아는’ 킬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지 리바(42경기 35골·0.83골), 쥐세페 메아차(53경기 33골·0.62골), 로베르토 바조(56경기 27골·0.48골), 필리포 인차기(57경기 25골·0.44골), 크리스티안 비에리(49경기 23골·0.47골) 등 킬러들이 즐비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별 예선에서 탈락한 이탈리아의 문제는 노쇠함과 함께 마땅한 킬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골잡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지만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철저히 감정을 숨긴 채 골에 집중하는 ‘냉정함’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골을 성공시키는 ‘유능함’,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듯한 ‘민첩함’ 등 이다.

킬러에게는 감정이 없다, 본능뿐

킬러들은 항상 골을 뽑아낸 후 달콤함과 짜릿함에 취하는 무아지경의 희열을 꿈꾼다. 하지만 온몸이 전율하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분. 그 1분을 위해 킬러들은 수많은 시간 눈물과 땀을 쏟는다. 킬러들은 찬사와 비난 한가운데서 외줄을 타는 운명이다. 골과 노골은 항상 극단의 갈림을 만든다. 골을 터트리면 최고의 찬사와 영광스러운 수식어가 붙지만 골을 넣지 못했을 때는 냉혹한 심판대에 올라야 한다. ‘Hero(영웅)’와 ‘Zero(0)’. ‘H’와 ‘Z’의 한 끝 차이지만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킬러들의 삶이다.

차범근 SBS 축구 해설위원(전 수원 삼성 감독)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골을 터트리지 못하고 부진하자 한 독일 신문은 ‘차붐! 벤치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고 골이 나오겠느냐’고 비판했다고 한다. 차 위원은 “골을 넣지 못하고 세 경기를 보내면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다 골을 넣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칭찬 일색이었다. 그게 우리네 삶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최고의 공격수라는 찬사를 받았던 황선홍 부산 아이파크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 수많은 기회를 놓친 이후 그는 ‘똥볼’이라는 굴욕적인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그는 “아마 그때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악플을 견디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86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6골)을 차지했던 잉글랜드 대표 골잡이 리네커도 현역 시절 골 행어(goal hanger·골문 바로 앞에서도 볼을 빨래 널 듯 골대 위로 넘긴다는 비아냥)로 불렸다.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과 결과에 따라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야 하는 운명 탓에 킬러들의 몸값은 비싸다. 포르투갈의 킬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는 연봉 208억원,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는 142억원을 받고 있다.

Hero와 Zero 사이에서 외줄타기 운명

네덜란드 출신인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을 맡을 당시 “승부를 결정지어라. 우리에게는 킬러가 필요하다(Kill the game. We want a killer)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는 한국 축구 선수들은 ‘킬러 본능(killer instinct)’이 부족하다고 한탄했다. 킬러 본능이란 스포츠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승부의 순간에 강한 ‘위대한 승부사들의 기질’을 뜻하는 말이다. 차범근·황선홍 등 불세출의 스트라이커가 뛰던 시절에도 한국은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재에 시달렸다. 킬러 본능은 단지 공격수에 국한된 것도, 한 명의 위대한 스트라이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팀 전체에 흐르는 아우라 같은 것이다.

한국에 킬러가 없는 이유로 크게 유전적·문화적 차이와 훈련 방법과 시스템 등 4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들짐승의 뒤를 쫓는 수렵이나 양을 모는 유목민족은 발바닥과 발가락의 근육을 관장하는 족척근(足蹠筋)이 발달한 반면 한국 등 농경민족은 발 감각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유전적인 이유를 든다.

또 낯선 사람끼리 경쟁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동성 사회에서는 공격적인 킬러 본능을 타고나지만, 낯익은 사람끼리 화목하게 살아야 하는 정착성 사회에서는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살다 보니 ‘킬러 본능’이 떨어진다는 문화적인 이유를 들기도 한다. 염치를 알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문화권에서는 킬러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등 아시아권 국가들이 킬러 부재에 시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의 축구 전문지 포포투는 2003년 킬러의 조건으로 골 결정력과 함께 ‘내가 넣어야 한다는 이기심’을 꼽았다. 호날두에게 잘 드러나는 이기심은 종종 팀워크를 해치기도 하지만 결국 골을 뽑아내는 유아독존적 성향을 말한다. 아시아 선수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성격이다.

이외에도 훈련 방식의 문제점을 꼽기도 한다. 지난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브라질 출신의 세르지오 파리아스 전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한국의 훈련 시스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축구는 골을 넣어야 하는 스포츠인데 한국은 패스 훈련에만 치중할 뿐 골 넣는 훈련이 부족하다. 결국 경기에서 골이 나오지 않는 이유”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어릴 때부터 패스와 조직 훈련에 치중할 뿐 다양한 상황에서 골을 넣는 시뮬레이션 훈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선홍이 최고의 킬러가 될 수 있던 이유 역시 독특한 득점 훈련법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건국대에 입학했을 당시 정종덕 감독은 멀대같이 키만 컸을 뿐 헤딩의 기본이 안 돼 있던 황선홍에게 매일 30번씩 다이빙 헤딩슛을 훈련시켰다. 황선홍은 끊임없는 다이빙에 무릎이 깨져 파스를 붙이고 훈련을 묵묵히 마친 후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다.

핌 베어벡 호주대표팀 감독이 한국을 맡고 있던 시절 “한국 스트라이커들은 외국인들에게 기회를 내주고 벤치에만 앉아 있다.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며 출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 킬러 유망주들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슛은 Kick이 아니라 Touch다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전에서 캡틴 박지성에게 킬러의 냄새를 맡았다. 후반 7분 상대 볼을 가로챈 그는 2명의 수비수를 뚫고 쏜살같이 30m를 내달려 GK까지 제치고 왼발로 골을 뽑았다. 만일 맨유에서였다면 그는 루니나 베르바토프 등 동료들에게 패스를 내줬겠지만 대표팀에서는 달랐다. 대표팀에서는 헌신하고 배려하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킬러 본능’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내놓은 자전적 에세이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중앙북스)에서 킬러가 되기 위한 비법을 적었다. ‘골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맨유의 전설이었던 노르웨이 킬러 올레 군나르 솔샤르와 일화를 전했다. 박지성은 “솔샤르는 나와 키도 비슷하고 체격도 크지 않다. 나보다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렇게 골을 잘 넣을 수 있었을까”라면서 “솔샤르는 ‘골대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강조하면서 어떤 패스가 어디로 오듣 간에 그곳(골대)으로 차 넣으면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솔샤르는 “슛은 차는 것(kick)이 아니라 갖다 대는 것(touch)”이라면서 단 1초의 시간도 망설이지 않고 골을 넣으려면 끊임없이 반복해서 훈련한 대로 기계적으로 슛해야 한다고 했다. 박지성은 “솔샤르의 얘기를 듣고 볼을 잡으면 빨리 판단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골은 지능이 아니라 훈련으로 습득된 무의식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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