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한국 VS 폴란드 (6월 4일 오후 8시30분·부산) : "또 골이네,아이구 골아파" 엥겔 감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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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아 '답답해 미치겠구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이렇게 게임이 안 풀리지. 이제 10분밖에 안 남았는데 도무지 구멍이 보이질 않네. 두골을 넣어야 이기는데 두골은커녕 비기기도 어렵게 생겼잖아. 아냐, 이대로 지면 큰일 나. 10분이면 서너골도 들어갈 시간인걸….

…그래도 그렇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우리 선수들이 왜 다들 저 모양이야. 도무지 힘을 못 쓰네. 어제 밤에 잠 안자고 딴짓들을 했나. 마누라하고 애인들 데려오게 한 게 잘못인가? 그래도 어젠 아무 일 없었을텐데? 저렇게 느려 터져서야 무슨 골을 넣겠어. 이거 죽겠구먼….

…어, 어럽쇼. 맙소사, 수비가 뚫렸어. 야, 파울을 해, 파울을, 아유, 안돼, 거기선 안돼-! 아이구, 또 골이네. 아이구 골이야. 누구냐, 누구한테 먹은 거야? 뭐 초이? 초이티….

…맞았어. 내 생각이 맞았어. 노장들로는 안된댔잖아. 답답한 놈들. 뭐? 스타? 스타는 스타지. 하지만 결정적일 때 뭘 해줘야 할 것 아냐. 아무리 홈팀이라지만 한국 같은 팀한테 두골이나 뒤지면 어떻게 하잔 말이냐고. 뭐, 월드컵 3위의 영광을 재현해? 그런 녀석들이 고작 한국한테 쩔쩔매? 에라, 이….

…가만, 내가 너무 흥분했어. 정신을 좀 가다듬자. 자, 뭐부터 해야 하나. 져도 두골 차는 곤란해. 어떻게든 한골이라도 만회해야 돼. 물고 물릴 수가 있잖아. 미국하고 우리는 종이 한장 차이니까. 나중에 골득실 따질 경우를 생각해야지….

창 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네. 내 시계가 고장났나? 바늘이 선풍기처럼 빨리 돌아가는군. 여기가 부산이라고 했지. 정말 싫다, 싫어. 비는 쏟아지고, 이건 웬 비린내람. 관중들은 왜 이렇게 극성스러워. 독일이나 잉글랜드 관중은 유도 아니네. 전부 빨간 옷을 입고는-. 저 프라이팬보다 작은 쇠접시는 뭐기에 저렇게 시끄럽게 두들겨대는 거야….

…아앗, 저, 저…두데크 녀석 땜에 미치겠네. 야! 예지! 하마터면 들어갈 뻔했잖아. 왜 저렇게 집중력이 없지? 얼이 빠진 것 같아. 뭐? 거미손? 벌써 두골이나 먹었는데 무슨 거미손이야. 차라리 거미줄로 바위를 묶는 게 쉽겠다. 전반에 그 첫 골 정도는 척 막아 줘야 거미손이지. 그러고도 하프타임 때 뭐라고 하니까 '워낙 기습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느니 어쨌느니 변명을 늘어놔? 그게 기습이면 90분 내내 기습을 당했단 말야? 시작하자마자 한골 먹는 바람에 경기가 꼬였잖아. 그리고 이 중요한 순간에 또 골을 먹어? 한 경기에 두골을 먹고도 거미손이란 말이냐. 한국 도착 이튿날부터 한국팀을 높이 평가하네 어쩌네 하며 한국 기자들하고 놀아나더니 그예 사고를 치는군. 그렇게 한국이 좋으면 아예 귀화를 해라 귀화를….

…하긴, 지금 예지가 문제야? 그래도 예지는 나아. 수비한다는 녀석들이 모조리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너무 느려. 몸이 크니까 그렇다고 치자. 한국 선수들이 엄청나게 빠른 것도 인정해 줘야지. 하지만 그 덩치로 몸싸움도 못하냐. 왜 다들 부딪치기만 하면 벌렁벌렁 자빠지냐고. 밥을 굶었냐, 잠을 못 잤냐….

…토마시 바흐도흐, 토마시 하이토, 토마시 크워스, 토마시란 이름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이반을 뺐는데도 셋이나 더 있네. 이름이 똑같아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헤매냐. 지역 예선 할 때만 해도 '철벽'이란 소리를 듣던 친구들이 어떻게 된 거야. 오늘은 철벽처럼 꼼짝을 못하네. 그러니 수비가 되냐. 발이 떨어져야 수비가 되지….

…바우도흐도 이제는 옛날의 바우도흐가 아니군. 저렇게 펑펑 뚫리면 두데크도 어쩔 수가 없지….

…카우주니도 안좋아. 슛 한번 못해 봤잖아. 봉크도 그렇고 코지민스키도 그렇게 한결같이 안좋군. 믿었던 미드필드가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어이, 피오트르 시비에르체프스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최종 엔트리에서 이반을 뺐다고 감독한테 덤벼든 자넬 내가 왜 대표팀에 붙여놨는데. 오늘 같은 날 뭔가를 보여달라는 얘기 아니었겠느냐고. 그런데 지금 이게 뭐야. 수비를 제대로 해 공격을 제대로 해. 지금 사보타주하는 거냐. 하프라인만 건너다니면 무슨 수가 나냐. 지금까지 제대로 찔러준 공이 하나도 없어. 몸싸움에서도 밀려. 쩝, 하기는 한국 애들이 저렇게 드세니 그럴 만도 하지만. 야, 시비에르체프시키, 그래도 관록이란 게 있지 않냐. 볼 키핑도 못하는 플레이 메이커가 어디 있냐….

…아, 한국 애들 정말 무섭네. 유럽에 전지훈련 다닐 때의 한국이 아니네. 그런데, 이름들은 왜 이렇게 어렵냐? 후앙순홍? 안중후안? 윤융후안, 윤중후안? 뭔 이름들이 다들 이렇냐. 후앙. 유명한 친구지. 나이도 많은 저 친구에게 당하다니. 어슬렁거리는 스타일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사실은 찬스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수비 두명을 달고 돌아서서 슛을 한거지? 비디오로 다시 봐야지. 꼭 뭐에 홀린 것 같군. 속은 것 같은 기분이야….

…저, 안. 그렇게 잡으라고 당부했건만 그예 뚫리네. 팍하고 윤, 저 조그마한 친구들은 요리조리 잘도 헤집고 다니고. 도대체 어디서 저런 친구들이 나왔지. 아니지. 비디오에서 보긴 봤어. 그때는 저렇게 못 뛰었잖아. 차붐 아들이랬지. 호랑이가 고양이를 낳을 리는 없지. 아아, 정말 잘 뛴다. 지치지도 않나봐… .

홍 마이영보라고 했지. 진짜 철벽은 저 친구야. 올리사데베는 왜 꼭 저 친구 앞으로만 가는 거야. 번번이 걸리면서. 홍. 귀신같이 패스길을 읽는구먼. 공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을 지키네. 나라도 저기로 찰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런데 그 길목을 막고 서 있으니 골을 넣을 재간이 있나. 야, 미치겠다. 시간은 다 됐는데. 이젠 진짜 시간이 다 됐는데….

…스트라이커 올리사데베, 폴란드의 자랑, 올리사데베. 제발 힘 좀 내. 이 중요한 순간에 뭐하고 있니. 골. 골. 골을 넣어야 자랑이고 골을 넣어야 스트라이커지. 이 중요한 순간에 물 위에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면 우리가 어떻게 이기냐. 한골만 넣어줘….

…아, 충성스런 바르토시 카르반. 이 친구가 그립군. 막판에 왜 부상은 당해가지고 이 꼴을 보게 만드나. 예선부터 한번도 안 빼고 뛰게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네가 없다니. 교체멤버로라도 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최소한 한골은 넣어줬을텐데 말야. 차라리 이반을 빼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야 이반이 왔으면 더 엉망이 됐을 거야….

…끝났어. 졌어. 젠장. 언론이 떠들어대겠군. 한때는 사이가 좋았는데. 인심이란 건 자고 나면 변하는 법이지.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라니. 지면 모든 게 끝이야. 선수나 협회나 기자들이나 지금까지 나라면 꺼뻑 죽던 저 친구들. 오늘 당장 숙소에 돌아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낯을 바꾸겠지. 16년 만에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딴 예지 엥겔. 폴란드의 영웅 예지 엥겔이 첫판부터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아냐. 그래도 아직 최악은 아니야. 이제 첫판을 했을 뿐인걸. 자, 어쩌나. 포르투갈을 이겨야 하네. 지면 끝장이야. 이길 수 있을까. 애초엔 한국을 이기고 포르투갈이랑은 비기려고 했는데.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군. 맞대결을 할 수밖에. 포르투갈을 이긴다면야 미국쯤은 문제도 아니지. 아, 계산이 너무 복잡해졌다. 그런데 저 친구들은 대진 운도 좋아. 미국에 져야 할텐데. 오늘 기세로 봐서는 포르투갈도 꼭 이긴다고 장담은 못하겠는걸. 홈팀이 무섭긴 무섭네….

한 국. 이 나라 인구가 4천4백만명이라고 했나. 땅 덩어리는 조그마한데 인구는 우리보다 많네. 50년 만에 첫승이라고? 좋아할 만도 하군. 근데 하필이면 왜 내가 제물이 된단 말이냐. 히딩크 저 친구는 입이 귀에 가서 걸렸군. 엄지손가락 엄청 세우네. 좋기도 하겠지. 저 능구렁이가 영웅이 되는군. 16강에까지 오르면 저 엄지손가락이 아예 손목까지 젖혀지겠군. 야아, 이게 무슨 망신이냐. 한국에 지다니. 조 추첨 때만 해도 조-오았는데. 진짜 머리가 아프군…,

…그런데 데이비드, 이 친구는 어디 갔나. 어디 간거지. 경기 끝날 때쯤 오겠다던 친구가. 엥? 히딩크 저 친구, 저 표정은 뭐야. 왜 이쪽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짓지? 으응. 그래. 자기가 나보다 한수 위라 이거지….

…어라? 데이비드가 저기 있네. 리버풀에서 날 원한다고 그랬잖아. 하필이면 오늘 저녁에 리버풀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다니. 푸른색 잉크를 써야지. 블루 사인. 축구 사상 최고의 몸값이랬지. 연봉 7백만달러라. 리버풀의 감독 엥겔. 세계 최고 연봉 감독 엥겔….

…리버풀 구단주가 저기 있군. 데이비드 무어. 이리로 오겠지. 어? 왜 저리로 가지? 음, 히딩크와 악수하는군. 하긴 두 사람도 구면이지. 인사는 해야겠지. 사진 기자들이 난리군. 어? 둘이서 사진을 찍네. 뭐하는 거야. 응, 데이비드가 오는군. 이봐, 왜들 저러는 거야….

…뭐라고? 히딩크가 리버풀의 다음번 감독이라고?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부임한다고? 무어가 나하고 히딩크를 저울질하다가 오늘 경기를 보고 결심을 했단 말이지. 뭐? 남들은 모르니까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모르는 척 조용히 하라고? 이런 쓰…

…도대체 이런 얘기가 어디 있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냐고. 아냐, 꿈일 거야. 아, 꿈이라면 빨리 좀 깨라. 그런데 웬 꿈이 이렇게 러닝타임이 기냐. 다음부터 내가 낮잠을 자나 봐라. 야 엥겔, 빨리 일어나!….

왕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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