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한국류의 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제6보 (75 ~ 87)]
黑. 이세돌 9단 白.구리 7단

바둑동네만의 얘기지만 한국 사람의 뇌는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매번 지는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문득 양처럼 착해보일 때도 있다.

상대의 약점을 지긋이 응시하는 것이 고전적인 스타일이라면 한국 바둑은 약점을 보는 즉시 덤벼든다. 내가 받는 상처를 겁내지 않고 맹수처럼 물고 늘어진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피가 철철 흐르는 이런 스타일은 미적 감각이 부족하고 격이 낮은 바둑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한국 바둑을 연구하고 따라한다.

이름하여 '한국류'가 세계를 풍미하게 된 것인데 다른 한편으론 세태의 가혹한 흐름이 바둑판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구리(古力)7단도 한국류가 몸에 밴 기사. 오늘 그가 토해내는 수들은 시종 사납고 날카롭다. 섣부른 후퇴가 종종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기에 유리해도 물러서지 않는다.

75에 이을 때 76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구리의 시나리오다. 상대가 A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수를 겁내지 않고 있다. 최악의 경우 귀와 수상전을 하겠다는 의지다.

흑 83.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이 순간에 상대의 뒷공배 한 개를 메운 이 한 수에 검토실이 나직하게 탄성을 토해낸다.'참고도'1이면 흑은 좌우가 연결된다. 그러나 공배 하나가 비어 있는 탓에 백2가 성립한다. 백은 2 대신 B로 눌러가더라도 여유가 있다.

83은 그런 점에서 처절하고도 비장하다. 상대의 약점 하나를 부각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