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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 “박근혜식 정면승부 결정판” … 친이 “항복하는 사람 등에 칼 꽂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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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친박계선 

지난달 2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서는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의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곧 박근혜 전 대표가 그에게 다가왔고, 둘은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온 홍 의원의 표정은 한결 안정돼 있었다. “처음엔 기겁을 했어요. 박 전 대표에게 두세 차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토론을 하지 말라’고 말렸죠. 그런데 박 전 대표가 마지막에 ‘미래로 나가기 위한 정리’라고 설명하기에 생각을 바꿨어요. (박 전 대표의 반대) 토론을 듣고 나니 내가 반대한 게 민망합디다. 탁월한 스피치였어요.”

홍 의원은 30일 이렇게 말했다. 전날 박 전 대표가 반대토론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 의원과 친박계 중진 의원 몇몇은 “이명박 대통령과 맞서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표를 말렸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왜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 이들에게 설명했다.

30일 오전 김무성 원내대표, 안경률·홍사덕·이윤성·진영 의원(왼쪽부터) 등이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 표결에 김 대표와 이·진 의원은 찬성표, 홍 의원은 반대표를 던졌다. [안성식 기자]

친박계 의원 대부분은 본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 박 전 대표가 반대토론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초 친박계에선 유정복·이정현 의원 중 한 명이 연단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28일 오후 박 전 대표는 스스로 나서겠다고 결정했고, 29일 오전까지 원고를 다듬었다. 친이계 초·재선들이 대거 나선 토론판에 박 전 대표가 직접 뛰어든 이유는 뭘까.

한 핵심 측근은 “세종시 수정안에 관해 지금껏 박 전 대표의 입장은 단편적인 반응 정도로만 나왔다”며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정리해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기자회견을 택했을 수도 있지만 평소 ‘국민을 상대로 정치한다’는 박 전 대표의 원칙이 본회의장을 선택하게 한 것 같다”며 “하지만 내용은 절제된 단어를 사용해 주장보다는 화해 메시지를 더 강조했다”고 말했다. “내용과 형식 면에서 ‘박근혜식 정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고도 했다. 한 재선 의원은 “청와대와 정부가 ‘역사의 기록에 남기자’고 한 만큼 박 전 대표도 스스로 기록을 남기는 ‘정면 승부’를 결심한 듯하다. 비판도, 평가도 자신이 지겠다는 책임감의 표현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30일 박 전 대표는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은 전화벨 소리로 시끄러웠다. 전날 반대토론에 대한 지지자들의 격려 전화였다. 2007년 경선 당시 박 전 대표를 도왔던 한 인사는 “경선 승복 연설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가 애국이었다. 마음에 묻고 미래로 가자’는 말이 ‘며칠, 몇 날이 걸리더라도 경선 과정의 일들을 잊자’고 한 대목과 비슷해 뭉클했다”는 말을 했다 한다.

박 전 대표의 토론 이후 일각에선 “박 전 대표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시점이 빨라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주변 인사들은 “너무 앞서 나가는 얘기다. 박 전 대표로선 아직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글=이가영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친이계선 

“밥이 안 넘어가더라.”

30일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한나라당 초선 의원이 전날 세종시 수정안 부결 과정을 떠올리면서 한 얘기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가 국회 본회의 반대토론에 나선 대목을 두고서였다. 그는 “친이계 의원 10여 명이 함께 저녁자리를 가졌는데 다들 기가 막혀 말을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여권 주류도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도 본회의 표결을 요구했던 건 그게 그나마 ‘모양새 있는 철군’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국회에서 결론을 내달라는 건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건데 국민투표에 부칠 만한 사안을 상임위 표결로만 끝낼 수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주류가 예상하지 못한 건 박 전 대표가 직접 반대토론에 나서는 거였다. 수정안 찬성 토론을 신청한 한 의원은 “신청자 명단에 ‘박근혜’란 이름이 있었지만 누가 잘못 썼겠지라고만 여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실제로 본회의장 연단에 선 것을 보고 주류는 감정이 크게 상했다. 한 인사는 “세종시를 포기하게 돼 대통령을 포함, 모두 속상한 상태인데 박 전 대표가 저렇게 치고 나오니 아주 기분이 안 좋다”고 말했다. “사실상 항복하고 물러나는 사람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박 전 대표의 발언 의도를 두곤 해석이 분분했다. 김문수 경기지사 사람인 차명진 의원은 “이탈자에 대한 경고”라고 봤다. 한 의원은 “친박계 균열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란 분석을 내놓았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했다는 ‘신뢰’ 이미지를 부각하며 본격 활동에 나선 것이란 견해도 있다. 향후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 간 관계 설정에 대해선 박 전 대표 또한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정두언 의원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도 이명박 정부가 성공해야 한다”며 “이는 이 대통령의 문제뿐 아니라 박 전 대표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정부 관계자는 “박 전 대표 측의 대선 전략은 친이계와 함께 안 하겠다는 것”이라며 “우리도 좀 더 수용해야 하지만 그쪽도 협조할 건 협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두나라당”=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세종시) 표결 결과로 이제 한나라당은 두나라당이 된 게 아니냐”며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임기 말에 여당 내부에서 갈라진 모습을 보인다면 앞으로 재미있는 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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