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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범은 우리 안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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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한 외국 전문가는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회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지적처럼 한국 국민 모두는 안보전선에서 총대 메는 것을 숭고한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전선에서 자기희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기서 국민들은 ‘국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여기에 ‘우리’와 ‘그들’의 구분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 사회정신이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느낌이다. 진보정치를 대체한 보수정치실험 2년 반의 현주소다. 2년 반 전 진보정치는 이미 탈진한 상태였다. “반대편에 있는 너를 죽이면 나는 영웅이 되고 내 행동은 정당한 것이 된다”는 이른바 ‘우리만’의 ‘자기정당화’ 논리가 지배한 결과였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권토중래할 수 있었다. ‘깨끗한 도덕성’과 ‘사회통합’의 ‘21세기형’ 나라 만들기의 보수 정치실험이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 이 보수정치 실험도 ‘자기정당화’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편가르기가 도를 넘어 ‘그들’이라는 상대를 아예 없애버릴 기세다. 그러다 보니 실험은 자기들 세계 속에서만 벌어지는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잘못을 스크린하고 교정하는 원칙의 체계가 작동할 리 없다. 천안함 사건과 6·2 지방선거 참패는 이런 게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처럼 보인다. 천안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한 보수논객이 한숨지었다. 자기가 듣고 있던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의 선율이 우리 안보가 무너지는 마지막 신음 소리같이 들렸다고…. 사실 천안함 감사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감사원과 군, 군대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 안보책임자회의,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면피에 급급한 합참의장, 유엔에 공개서한을 보내 애국논쟁을 불러일으킨 참여연대, 민심이 다 돌아섰는데도 선거승리를 확신한 여당 등을 보고 있노라면 이 보수 논객의 한숨이 결코 기우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이 자기논리의 불길이 시민사회 곳곳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전에는 병역면제, 위장전입, ‘위선적’ 특목고 입학 같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못 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 받는 세상이 돼 버렸다. 이러다 보니 시민사회가 소방수가 아닌 방화범이 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방화범은 우리 안에 있다”고 외친 프리쉬의 희곡 ‘정직한 사람과 방화범’의 한 장면이 남의 소리같이 들리지 않는다. ‘수상한 정치적 방화를 모의하는 두 명의 하숙생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성냥을 빌려주는 주인공’의 모습이 바로 우리 사회의 단면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민나가 도로보”였던 세상을 바꾸어 놓았듯이 “우리 안에 방화범이 양산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리쉬가 얘기하는 천국(권력)에 대한 지옥(사회)의 스트라이크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임무는 벌 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 천국은 벌 받아야 할 대상에게 너무 많은 ‘훈장’을 수여했다. 6·2 지방선거는 바로 이에 대한 지옥의 반란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침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내부로부터의 붕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분열된 프랑스의 통합을 이루어 낸 드골 대통령은 “군대는 가장 완벽한 사회정신의 표현”이라고 했다. 사회정신이 건전하지 못하면 군대가 강해질 수 없다는 말이다. 월드컵 16강 진출이 결정되기가 무섭게 전직 여당대표와 축구협회장이 “병역특혜 건의” 운운하는 현실 속에서는 강한 군대를 육성할 건전한 사회정신을 기대할 수 없다. 방화범이 우리 안에 발붙이기 어려운 사회정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대가는 엄청날 것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가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약력=1948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학사·석사, 미 UC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분단 반세기 남북한의 정치와 경제』 등 저서·논문 다수.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