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엄정욱 156㎞ 싱싱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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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강속구 투수 릭 본은 포수 미트보다 백네트에 던지는 공이 더 많은 3류 투수였다. 그러나 릭 본의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낸 감독은 그에게 안경을 권했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릭 본은 제구력을 갖춘 빠른 공을 뿜어내며 팀을 정규시즌 1위로 올려 놓는다. 이것은 1989년 선풍적 인기를 끈 야구영화 '메이저리그'의 줄거리다. 2002년 한국 프로야구에 릭 본과 같은 선수가 나타났다. 바로 SK의 고졸 3년차 투수 엄정욱(21)이다.

엄선수는 지난 11일 문학구장에서 벌어진 기아와의 경기에서 7-0으로 앞선 9회초 등판,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빠른 1백56㎞의 광속구를 던졌다.

선동열·박동희가 던진 1백55㎞를 단숨에 뛰어 넘은 것. 다음날에도 엄선수는 1백55㎞의 직구를 뿜어댔다.

엄선수는 젊은 시절 경북 점촌의 씨름판을 주름잡던 아버지 엄상복(57)씨로부터 타고난 힘을 물려 받았다. 운동에 큰 소질이 없었지만 워낙 힘이 좋아 같은 또래보다 훨씬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고, 수유초등 4학년 때부터 글러브를 꼈다.

중앙중-중앙고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한 엄선수는 고교시절 1백40㎞ 후반의 강속구를 뿜어냈지만 제구력은 형편없었다. 포수 키를 넘어 백네트를 맞힌 공이 더 많았다. 바로 '릭 본'이었다. 고교 3년 내내 전국대회에서 거둔 승리가 단 1승이었다.

그러나 엄선수는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SK(당시 쌍방울)에 2차지명 2순위로 뽑혀 계약금 1억1천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주위에서는 깜짝 놀랐다. 1승짜리 투수가 1억1천만원이라니.

SK 김바위 스카우트는 "가능성을 보고 데려왔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빠른 공 하나 갖고 박찬호에 관심을 가진 것과 같은 이치죠"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입단 첫 해 2군 경기에서 1백53㎞의 공을 던졌다. 당연히 코칭 스태프의 눈길을 끌었다. 시즌 말미에는 1군 진입에 성공,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네 경기에 출전해 방어율 6.35를 기록했다. 역시 제구력이 문제였다. 입단 동기 이승호가 신인왕을 차지하며 팀의 간판 선수로 발돋움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모습이었다.

2001년 또 다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 엄선수는 공을 던질 때 팔꿈치와 배에 통증이 왔다. 시즌 도중엔 재활군으로 떨어졌다. 이때부터 최계훈 투수코치가 엄선수를 집중적으로 지도했다. 우선 팔꿈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팔의 각도를 낮췄고, 하체를 이용할 수 있는 투구폼을 가르쳤다.

2002년 그의 공은 더욱 빨라졌다. 2군 경기 중 스피드건에 '마의 1백60㎞'가 찍혔다는 얘기도 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공이 포수 미트에 정확하게 꽂혔고, 포크볼도 폭포수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1군으로 복귀했고 여전히 제구력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1m91㎝·93㎏의 늠름한 체구에서 나오는 직구는 위력적이다. 온 힘을 다해 던지는 전력투구가 아닌데도 속도는 총알 같다.

'개구리'라는 별명답게 큰 눈이 인상적인 엄선수는 "그동안 게으른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앞으로 고된 훈련도 이겨내고 마음을 가눌 수 있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해야죠. 1군에 더 오래 남는 것이 현재 목표입니다"라며 큰 눈에 힘을 줬다.

엄선수 얼굴 뒤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릭 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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