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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정치판 한가운데 선 대쪽 : 黨 장악했지만 끊임없는 포용력 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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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 무렵 이회창은 총리로서 역할에 한계를 느낀 모양이다."총리는 일하는 게 아니라 정부의 인기를 올려주는 직업이더구먼.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총리에서 물러난 결정적 계기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였다.

당시 YS는 통일·안보관련 주요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외무·통일·국방부 장관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구성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내각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데 총리가 배제된 것은 잘못"이라고 항의했다. 청와대는 고민 끝에 총리비서실장을 배석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북한벌목공 수용 대책 등의 정책이 흘러나오자 이회창은 간부회의에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논의사항도 총리의 승인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통일 부총리 이영덕(榮德)과 외무부 장관 한승주(韓昇洲)를 집무실로 불러 따로 다짐도 받았다.

'총리 없는 안보회의'에 항의

YS는 회고록(2001년)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총리 발탁 때 반대가 많았다.'일체의 공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안기부장에게 업무보고를 요구하는가 하면 나와 독대한 장관들에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했다.…총리의 법적 권한을 주장하며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를 꺼리더니 급기야 북핵 및 외교 문제 등 대통령의 업무를 자신이 지휘하겠다며 언론에 공개해 버렸다.…나는 이회창 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호되게 질책했다. 그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해임조치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고성이 밖에서도 들렸다. 그는 내 집무실을 나가면서 출입문을 찾지 못해 허둥대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회창은 사석에서 "어른들이 고성은 무슨 고성…"이라고 말을 흐리면서도 "이런 식의 개혁은 곤란하다. 다만 정상적인 형태의 개혁으로 돌아오면 밖에서나마 도와드리겠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이회창은 측근들이 YS의 회고록에 대한 법적 대응을 주장하자 "고발했다가는 정말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그냥 넘겼다고 한다.

대통령 김영삼과 총리 이회창의 대결은 이회창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는 외형상의 손익 계산일 뿐이었다. 해임된 이회창의 인기는 급등한다. 정두언은 이회창이 물러난 날 총리실에 격려전화가 폭주했다며 "총리실 역사상 하루에 전화가 그렇게 많이 오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정무·공보수석을 지낸 주돈식은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50% 이하로 떨어진 것은 이회창 국무총리 해임 사건이 계기가 됐다. 반면 이회창씨는 인기도 조사의 대상에도 끼지 못했던 위치에서 무려 35%선으로 뛰어올랐다(『문민정부 1천2백일』, 97년)"고 말했다. 최근 정치권의 화제가 노풍(風·노무현 바람)이라면, 당시엔 이풍(風·이회창 바람)이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이회창은 정치권의 영입 대상 1호가 됐다. 95년 지방선거 때 여야 모두로부터 구애를 받는다.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金大中·DJ)의 최측근 권노갑(權甲)이 접촉에 나섰다. 정대철(鄭大哲)도 자주 구기동 풍림빌라에 들렀다.

그러나 이회창은 96년 1월 YS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한국당 입당을 결정한다. 96년 1월 신한국당 15대 총선 선거대책위원장에 지명된다. 물론 진통이 있었다. 부인 한인옥은 한 때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혼하고 가면 몰라도 그런 소리 말라"고 할 정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가세에 힘입어 신한국당은 15대 총선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둔다. 그러나 이같은 순조로운 출발에도 불구하고 법관이 천직이었던 이회창이 정치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오는 내적 갈등이 심했던 것 같다.

"정치에선 옳고 그른 일과,해야 할 것과 안해야 할 것의 구분이 때로는 선명치 않다.정치인으로서의 행동 양식은 법조인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는 부분도 많지만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는 밑바탕은 같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자전 에세이 『아름다운 원칙』)

그래서인지 그의 정치 현실에 관한 발언에는 '고민'이 배어 있다.

"소나무가 토양이 안맞아 말라죽으면 죽었지 전나무나 갈대가 되지는 않는다."(96년 1월 30일),"더러운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구태의연한 낡은 정치판의 경험을 거쳐야 정치적 검증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도착적 심리상태다."(96년 11월 28일)

이회창의 친구로 대법관을 지낸 오성환(吳成煥·변호사)은 "개인적으로 볼 때 이회창은 끝까지 대법원장의 길로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정치인들은 순간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판사들은 직업 윤리상 그런 것을 못한다. 그게 몸에 배어 있을 테니 정치하는 데 어려움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은 정치에 몸담은 지 6년이 됐지만 여전히 기성정치인과 정치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이 된 후인 2001년 5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회창은 "분장하고 화장하는 게 정치 같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법관시절과 비교해서 본 자신의 처지에 대해 "지금이야 법관 쪽에서 보면 완전히 타락한 거지 뭐"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화됐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는다."정치감각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이회창은 2000년 16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이기택(基澤)·신상우(辛相佑) 등 당내 중진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그는 이같은 공천으로 정치쇄신 의지를 보여줘 '이회창식 리더십'을 구축했다는 평가와 함께 "이회창은 무섭다"는 세간의 비평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를 놓고 그와 경합했던 이인제(仁濟)·이한동(漢東)·이수성(壽成) 등이 결국 당을 떠났다. 한나라당 초대 총재 조순(趙淳)이나 박근혜(朴槿惠)와도 결별했다. 이로 인해 '포용력 부족'이란 지적이 계속됐다.

이회창은 현 정부 들어 세풍(稅風·국세청을 동원한 대선자금 조달 혐의)·총풍(銃風·휴전선 긴장조성을 위해 북한 측에 무력도발을 요청한 혐의)·안풍(安風·15대 총선에서 안기부 자금의 신한국당 유입 혐의)으로 정치적 곤경에 처했다. 그 스스로 "살아 남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과정을 거쳐 그는 '반(反)DJ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한 이래 노풍이 일어날 때까지 2년 동안 그는 지지율 1위, 당선 가능성 1위였다.

"DJ는 자유형 나는 개헤엄"

이같은 대여투쟁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모든 혐의들이 '이회창 죽이기'를 위한 여권의 음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선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총풍·안풍 등의 재판 과정에서 그가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고 밝혀진 부분도 있지만, 세풍의 경우 그가 해명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회창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주변정리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호화빌라 파문과 아들의 병역문제, 측근 정치와 친인척의 정치개입을 공세대상으로 삼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도 이회창은 최근 자신 및 가족과 관련한 루머를 적극 차단하고 있다. 스스로 "내 가족도 공인"이라며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친인척 감찰기구를 두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앞서 4월 5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부인 한인옥이 점을 보러 다녔다거나, 아들 이정연이 사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거나, 아버지 이홍규가 신사참배를 하는 사진이 있다거나, 린다 김이 보내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등의 각종 소문을 일축했다. 부인 한인옥이 16대 공천에 간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단 한 번도, 그리고 한 사람도 없었다"고 잘랐다.

그러나 이회창이 '가족의 조언'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는 관측이 남아 있는 한 '한국적 정치현실'에선 친인척의 주변에 사람이 꼬이게 된다. 따라서 그의 측근들조차 이회창의 가족문제가 대선 과정에서 운신에 부담을 주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회창은 자신의 거취 문제 등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가족회의를 연다고 한다. 15대 대선 낙선 후 8개월이 지난 98년 8월 야당총재로서 정치 일선에 복귀할 때도 가족회의를 열어 "내 꿈을 실현하게 해달라. 대통령 자리가 목표가 아니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가족들도 동의했다고 한다.

이회창은 97년 대선에서 39만표차로 김대중에게 패배한 다음날 펑펑 울었다. 후보 경호를 위해 파견됐던 경찰들이 복귀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경호요원이 눈물을 터뜨리자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린 때문이다. 10여분 동안 눈물을 흘렸고 당사의 후보사무실은 눈물바다가 됐다. 차를 나르던 여직원들도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회창은 그 후 "강을 헤엄쳐 건너는 게 대선이라면 상대는 자유형을 하는데 나는 개헤엄을 쳤으니…"라고 자신의 미숙함에 대해 말했다고 친구 서병국은 전했다. 그는 또 사석에서 "(당시)TV토론 녹화를 봤다.'저러니 떨어졌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서툴렀다"고 말한 일도 있다.

이회창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두번째이자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10일 잠실체육관에서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마치고는 단상에서 넙죽 업드려 큰 절을 했다. 이 장면을 보고 법관 출신 후배는 "'내가 알던 그 이회창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자유형 영법(泳法)'을 유연하게 구사해내는 노련한 정치인이 될지, 흉내만 내다가 자신의 표현처럼 '타락'만 하고 말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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